2012. 7. 6. 21:59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연이틀 큰비가 쏟아지니 껄쩍지근 하게 남아 있던 온누리의 잡것들이 다 쓸려가는 느낌이다.
어느날 또 진짜 큰물이 나서 속을 뒤집어놓을지 모를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반갑기 그지 없는 비다.
게다가 핑계 김에 어제, 오늘 원고농사 맘잡고 할 수 있었잖은가. 그게 다 비 덕분이지...ㅎㅎㅎ
그런데 몸이 단다고 해야 하나? 안달이 나서 자꾸만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문이란 문을 모조리 닫으면 소음이 그럭저럭 찬단되는 집구조라서 비줄기 내리치는 소리가 잘 안들리니 말이다.
그런데 몇 번을 내다 봐도 빗줄기가 잦아들 기세가 아니다. 잦아들면 뭐 할라고?
그야 논에 나가서 피사리 하려고 그랬지.
그제 아침 피사리 하다가 논바닥이 드러나는 바람에 지심이 잘 매지지가 않았지.
물꼬를 단단히 막아 놓고, 물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할 요량이었는데...
어제, 오늘 그만 큰 비를 맞은 거 아닌가.
게다가 아무래도 잦아들 기세가 아니니 답답할 밖에.
오늘도 피사리는 글렀나보다 체념을 하려는 순간,
5시를 넘어가면서 빗줄기가 힘을 잃더니 마침내 멎는 게 아닌가.
후다닥 하던 원고작업을 마무리하고는 길을 나섰다.
일단 학교앞 논부터.
비온 뒤라선지 역시 물이 많이 불어 있다.
누군가 물꼬를 반달모양으로 막아놨는데, 물길은 그 위로 넘나드는 정도다.
더 볼 것도 없이 자전거를 기수를 모정논으로 돌린다.
남새밭도 비온 뒤끝이어선지 한껏 물이 올랐다.
오랜 가뭄에 일찌감치 고동을 올린 열무, 아욱, 쑥갓, 상추...
이제사 흠뻑 적셔주니, 이런 걸 병주고 약주고 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꼴이 어찌나 보기 싫은지 상추 고동을 모조리 뜯어놓았다.
고동이 뜯겨나간 자리에서 하얀 젖이 솟아나고, 특유의 쓴 냄새가 확 풍겨온다.
나머지 푸성귀들은 둘러봤자 속만 쓰리고...
하이고,
옛 사람들이 남자 논농사-여자 밭농사로 성역할을 구분했던 뜻을 조금은 알 듯도 한다.
지금, 그런 쓰잘데기 없는 잡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고...
퍼뜩 정신을 가다듬고, 논으로 향한다. 역시 물이 가득 찼다.
세찬 기세로 물꼬를 넘어 아랫논으로 쓸려 나간다. 아예 논두렁을 타 넘는 놈들도 있다.
벼로 말할 것 같으면 허리께까지 물이 찼고, 피는 가슴께까지 찬 폭이라.
정신 없이 뛰어들어 피줄기를 잡아 뽑기 시작한다.
역시 잘 뽑히긴 하는데, 물이 너무 높아서 보이지 않는 아랫 부분이 좀 캥긴다.
그 아래에도 어린 피가 자라고 있다면 이건 반쪽짜리 피사리 아닌가.
그렇다고 물이 빠질 때까지 손놓고 있을 순 없고...
한번에 다섯 줄씩 잡고 갔다, 왔다, 다시 세 번째 길을 정신없이 가고 있는데 다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이번이 네번째던가. 아까부터 벨이 울리는데 받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무슨 전환지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다. 둘째 한슬이 녀석일 게 뻔하다.
어제 오늘 무슨 극기훈련 비슷한 캠프에 다녀왔는데, 오던 길로 바로 마실 나갔었다.
논에 도착할 때 쯤 전화가 왔는데...
화산 종리에 있는 제 친구 집이란다. 너무 먼 길이니 절 좀 데려가란다. 한 시오리 쯤 되는 길이다.
좀 어이없기도 하고, 바쁜 와중이라 짜증도 나고 해서 어쩌다 그리 됐냐고 다그쳤다.
어떨결에 통학버스 타고 가게 됐단다.
"네 맘대로 얘기도 없이 갔으니까, 오는 것도 네 재주껏 오라!"고 버럭 내지른 뒤 전화를 끊었던 참이다.
전화를 계속 안 받기도 그렇고, 그 때 쯤엔 이미 날도 저물어서 어차피 끝내야 할 판.
논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꺼내니 녀석 전화가 맞다.
뭐, 어쩌겠나... 남의 집에서 재울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그 먼 길 걸어오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후다닥 씻고 나서 자동차 시동을 건다. 하루가 이렇듯 피곤하게 마무리가 되는 구나.
그래도 내일 아침나절까지 모정논 피사리는 마무리 될 것 같아 마음은 한결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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