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7. 18:20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다 해치우고 나니 하늘에라도 오른 듯한 기분이다.
오늘 아침, 마침내 모정논 피사리를 마쳤다. 이게 몇 일 만이던가.
오늘은 작정을 하고 나섰다.
마침 토요일이라 아이들도 등교하지 않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6시, 일어나자 마자 이곳으로 내달렸다.
뭐, 작업내용이야 뻔한 것. 그래도 어제보다 물이 더 빠져 작업이 한결 수월하다.
몇 일 동안 같은 일에 매달리다 보니 이젠 벼와 피가 얼추 구분이 되는 것도 같다.
그 동안이야 벼포기 사이의 빈틈에 들어찬 지심들을 모조리 매버렸으니 딱히 구분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나중엔 벼포기에 한 가닥 붙어 있는 놈들이 보이더라 이거다.
뭐, 공인을 받은 게 아니고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니 100% 확신할 순 없지만.
한 두 시간 반쯤? 논 가운데 피사리가 끝났다.
처음 봤을 땐 오늘 다 마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생각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니 노동의 수고로움을 잊을 수 있었던 거라.
그것이 가공되지 않은 노동, 이른바 1차산업 노동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Before <-- 피사리 --> After
밖으로 나가려다 힐끗 보니 수풀이 우거진 가로축 논두렁이 눈에 들어온다.
줄기가 논 안으로까지 벋어서 벼는 벼대로 치이고, 지심은 지심대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저것도 치워야지 싶다. 물이 들어오는 곳부터 시작해 억센 풀들을 들추고, 뜯어낸다.
한 반 시간 남짓 하고 나니 논두렁과 논의 경계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Before <-- 논두렁 수풀 --> After
그제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피사리를 다 마쳤다는 느낌이 온다.
마침 바로 옆 비닐하우스에 방충망을 치고 있던 김장로도 "이제사 논 같다"며 추임새를 넣는다.
방충망? 방울토마토를 하는데 벌들로 하여금 가루받이(수정)를 하게끔 하려니 환기창을 그걸로 가려야지. 아무튼...
그 때 쯤 해서 휴대폰이 울린다. 운영 씨다.
"샘골 피투성이 논, 오늘 제초기 빌려서 작업하다가 고장나는 바람에 고쳐왔는데, 조금 있다가 시작하려고요."
아이들 수영장 데려다 주고, 휘발유 조금 사들고 가마 했다.
막 자리를 뜨려는데 그제서야 논을 뒤덮고 있는 개구리밥이 눈에 들어오다.
어찌나 많이 번식을 했는지 켜켜이 쌓여 있을 정도다.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을 일러 '부평초(浮萍草)'라 하는데, 이 놈이 바로 그 부평초다.
그런데 내겐 이보다는 이동순 시인의 '개밥풀'이 더 깊숙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스무살 무렵, 80년대 초반의 그 엄혹한 세월에 결기를 세울 때,
그 시는 참으로 무겁고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여기 다시 한 번 올려 본다.
참, 경상도에서는 개구리밥을 개밥풀이라고 부른단다.
개 밥 풀
이동순
아닌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 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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