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4. 23:02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이제 벼농사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돌이켜보면 얼결에 시작한 농사였고, 그런 탓에 뜻하지 않은 일이 꼬리를 물었다. '내 농사'라고는 난생 처음이다보니 둘쭉날쭉, 두서도 없고 요령도 없었다. 일머리도, 농사의 기초원리도 모르니 멍청히 있다가 때를 놓치거나 무턱대고 시작했다가 오락가락하기 일쑤였다. 나름대로 가늠해본 예상치는 번번이 빗나갔다. 그 바람에 몸뚱이만 곱절로 생고생을 해야 했다.
어즈버~ 그러는 와중에 벼농사도 이제 반년이 가까워온다. 하도 애를 먹고, 애를 태운 탓인지 이제 벼농사 하면 피사리가 떠오를 지경이다. 물론, 피사리는 지금도 진행형이고, 당장 내일도 나가봐야 한다. 7월초부터 벌써 두 달이 넘어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그렇게 피사리에 매달릴 때는 '그래, 이번에 매면 깨끗해지겠지' 생각했는데... 지금 피사리를 하고 있는 논배미도 그랬다. 두 달 전, 키가 한 뼘 남짓인 피를 뽑아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때 용케 농사꾼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놈들은 이제 율무대나 산죽처럼 뻣뻣하게 자랐다. 그리고 지난번 태풍을 만나 대부분 논바닥에 쓰러져, 본의 아니게 몸을 숨기고 있다. 그래서 보이지 않지만 막상 논에 들어가 벼포기를 헤쳐나가다 보면 한 발짝이 멀다 하고 납작 엎드려 있다. 참말로 징글징글헌 놈들이다. 뙤약볕 아래서 그렇게 잡아없앴건만 아직도... 차라리 허망하다고 해야 하나...
하이고~ 피사리 얘기는 그만두자. 이젠 얘기를 꺼내기도 남사스럽다. 더욱이 이삭이 여물어 거둬들일 때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가을걷이 준비도 그리 녹록치가 않다. 특히 늘 물이 고여 있어 질척질척한 샘골 아랫논. 이 논은 샘골의 맨 아래에 있다. 그러다보니 샘골에 있는 논이란 논을 적신 물은 죄다 이 곳으로 합류한 뒤 수로를 따라 빠져나간다. 문제는 그런 상태에서는 나락을 거둬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질척한 논에는 콤바인(벼베기와 탈곡을 동시에 하는 기계)이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창에 푹푹 빠져가며 낫으로 일일이 베어낸 뒤 따로 탈곡을 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벼베기를 해줄 사람이 있을 지도 의문이다. 때문에 어떻게든 논바다을 꼬들꼬들 말려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위에서 내려온 물이 논으로 흘러들지 않도록 물길을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두렁과 논 사이에 도랑을 내야 한다. '도랑 치고 가게 잡고' 할 때 그 도랑 말이다.
겉보기엔 '넓직한 논두렁'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가운데 쪽에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실, 이 논에는 이미 그 도랑이 있다. 그런데 그런 원리를 모르고 도랑을 방치해뒀던 것이다. 도랑은 흘러든 토사로 메워지고, 잡풀까지 얼키고 설켜 논두렁과 아예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 돼버렸다. 언뜻 보면 논두렁을 넓직하게 쌓은 거처럼 보인다. 그걸 제모습으로 되돌려놔야 한다는 것이다. 앞집 어르신한테 그 얘기를 들은 게 대엿새 전이다. 그 얘기를 듣고 그 자리를 둘러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굴삭기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 어차피 삽이나 쇠스랑 같은 연장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짓을 하자면 몇일이 걸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몇 일 새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해오던 터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여느날처럼 피사리를 나서려다 거기에 생각이 닿았다. 언제까지 미룰 순 없는 일이고, 생각난 김에 해치우자 싶었다. 실은 어젯 저녁, 피사리를 끝내고 시험 삼아 도랑 복구작업을 해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일단 운영 씨한테 전화. "오전에 별 일 없으면 전에 얘기했던 샘골아랫논 도랑치는 작업 좀 하자고..." 11시까지는 시간을 낼 수 있다고, 그러마고 한다. 더욱 힘이 솟는다. 사실, 작업이래야 간단하다. 줄기풀과 토사로 덮힌 도랑을 퍼내기만 하면 되는 거다. 이를 테면 소규모 준설작업인 셈이다. 쇠스랑으로 안쪽부터 퇴적물을 퍼 올려 둑을 쌓았다. 그렇게 작업을 해나가니 물길이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아간다. 조금 뒤 도착한 운영 씨가 물길 끝쪽을 정리하고, 윗배미와 연결수로를 팠다. 그렇게 두 어 시간 작업을 하고 나니 마침내 도랑 전구간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물길이 곧게 벋어서 시원스레 빠져나간다. 바닥에 깔려 있는 흙덩이를 추어올려 쌓는 것으로 작업은 한나절만에 모두 끝났다. 때를 맞춰 굵은 소나기가 쏟아진다. 쇠스랑을 계속 놀리며 비를 흠뻑 맞았지만 시원하기만 하다.
줄기풀에 묻혀 있던 도랑이 이렇게 제 모습을 되찾았다. 위 사진과 견줘보시라.
세로 방향 물길 모습. 물흐름이 시원스럽다.
그렇게 시작된 빗줄기가 밤이 깊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다. 소리로 봐서는 거의 '퍼붓는' 수준이다. 때맞춰 도랑을 정비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어떻게 됐을 지 걱정이다. 설마 새로 쌓은 두렁이 무너지진 않았겠지... 수확기까지 이런 추세로 비가 내리면 또 어쩌나.
가뭄에, 장마에, 태풍에, 막판 큰 비까지... 참으로 힘든 한 해가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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