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0. 22:20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지난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내리 나흘을 논에 나가보지 못했다. 목, 금은 책원고 마지막 교정작업에 매달리느라 토, 일은 서울서 떼로 몰려온 벗들과 어울리느라... 하긴 그 사이 비도 꽤 쏟아져 무리를 해서 나가봤더라도 그다지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나흘이 흐르고 맞은 월요일 아침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흰구름 두둥실 떠 있는 하늘은 높직하니 파랗고, 공기는 선선하다. 놀기도 딱이지만, 일하기도 딱인 날씨.
일이 끊기기 직전, 그러니까 지난주 수요일까지 했던 일은 막바지 피사리였다. 그러다가 열떨껼에 쓰러진 나락을 일으켜세워 묶어주는 작업을 이틀인가 했었고... 그렇다면 오늘 할 일은 나락 묶어세우는 일이거나 피사리가 되겠다. 그런데, 꽨 오랜만에 나서는 길이니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해오던 대로 일단 학교앞 논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그런데 예상을 넘는 광경. 그 사이 피가 모가지를 많이 올렸다. 여기저기 무더기를 이루는 피 모가지들... 어쩌겠는가. 베어내는 수밖에. 낫(피사리용은 일반낫보다 칼날이 가늘고 짧다)을 꺼내들고 눈에 띄는 대로 핏단을 잘라 논두렁으로 던져놓는다. 생각보다 양이 많다. 그런데 지난번 태풍 때 날라온 비료푸대가 논바닥에 쳐박혀 있다. 베어낸 핏단을 주체하기가 벅찬는데 잘 됐다 싶다. 베어낸 핏단을 차곡차곡 담아서 들고 이동하니 훨씬 편하다. 그럭저럭 논바닥 전체를 훑고 나니 시간 반이나 흘렀다. 다른 곳이라고 사정이 다르랴 싶어, 차례에 따라 모정앞으로 자건거를 몰았다. 그런데...
우리집 앞 길 건너편에 있는 '피바다'논 풍경. 앞쪽에만 벼이삭이 보일 뿐 그 뒤쪽으로는 온통 피 모가지에 점령돼 있음을 볼 수 있다.
모정앞 논은 그래도 이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크게 봐서는 오십보백보다.
아! 이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참상'이다. 동네 어르신들 모정에 앉으면 이 논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온다. 혹여 '농사 짓는 놈이 논배미가 개판'는 공론이 돌까 싶어서 늘 신경이 쓰이는 곳이다. 해서 다른 논 피사리 한 번 할 때, 이 곳은 두 번이나 맸던 터다. 그것도 마지막으로 맨 게 채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온통 피 투성이다. 논 바닥 전체에 빼곡히 박혀 있지는 않지만, 마치 모래사장으로 밀려드는 물결처럼 여러 겹 띠를 형성하고 있다. 수십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봤다면 호피무늬처럼 보일 것 같다. 우리집 앞 길 건너편 논이 '피밭'이라 "그래도 우리논은 양반입네~" 핑계를 대볼 요량으로 엊그제 사진을 찍어두었는데... 거의 오십보 백보다.
그래도 어차피 해야 할 거라면 해치워야 한다. 당초 계획이야 한 번 둘러보는 거였다만 상황에 닥치면 일이 그렇게 흘러가기 어렵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탓이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낫을 꺼내들었다. 마침 모정에 나와 계시던 어르신도 추임새를 넣는다. "맞어! 이거 안 없애면 왕창 씨 받어서 내년에 그대로 올라오니께. 여기 쌓아놓은 이삭들도 나중에 태워버려야 혀. 그게 얼매나 독헌지 소가 먹고 똥으로 싸도 싹을 틔운당게. 암튼 잘 허느고만. 그나저나 멫일은 걸리겄어."
이제 빽빽하게 들어찬 볏단 속을 헤집어 왼손으로 핏단을 간추린 뒤 낫으로 밑동이나 중도막을 벤다. 베어낸 피 이삭은 비료푸대에 꾹꾹 눌러 담는다. 그런식으로 비료푸대가 꽉 차면 그걸 모정앞 콘크리트 마당까지 옮겨서 쏟아붓는다. 어르신 얘기대로 말려서 태워버려야 하니까. 아침나절 두 어 시간이 후딱 지나고, 오후시간도 금새 흘러갔다. 하루를 꼬막 채운 셈이다. 8시간 노동... 이게 얼마만인가. 불볕더위에, 장마에 하고 싶어도 못했던 온종일 작업을 족히 몇 달 만에 해본 것이다. 그래도 아직 반도 다 베어내지 못한 것 같다. 정말로 몇 일이 걸리면 곤란하다. 이곳 모정앞이 아니라도 피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면 여물어서 저절로 논바닥에 떨어지면 주워담을 수도 없다. 그러니 되도록 최단기간에 해치워야 한다.
아무튼 피! 꿈에 볼까 무서운, 징글징글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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