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0. 23:30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참으로 오랜만에 단비가 내리고 있다.
새벽부터 시작했나, 내리다 멎기를 거듭하고 있는데 빗줄기가 주룩주룩 시원하기만 하다.
이 얼마만인가. 물경 스무날 넘게 쨍쨍하기만 하던 하늘이 마침내 물기를 머금었다.
때를 맞춰 지긋지긋하던 무더위도 물러난단다. 지금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보름 넘게 이어지던 '폭염', 섭씨 35도를 넘어 38도를 웃돌던 푹푹찌는 날씨였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 자. 날씨 얘긴 그 정도로 해두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그 피사리?
20일 가까이 후속 '전황보고'가 없고, 블로그 자체도 아무 기척이 없으니 궁금할 만도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피사리는 어제 사실상 끝났다.
끝났다? 작전이 끝나면 대대적인 승전기념식이라도 열 것 같은 기세더니...
그리고 '사실상'은 또 뭔 말인가? 실제로는 끝나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렇다. 실제로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구간 30~40평 정도, 한 두 시간 일거리가 남아 있긴 하지만 거기서 멈추기로 한 것이다.
남겨 둔 20~30평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한 마디로 '피말리는 작전'이 '승전'으로 끝나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투는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힘겨웠고, 오래 걸렸다.
사실, 뚜렷한 근거가 없는데도 웬일인지 열흘 남짓이면 될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자 진도는 더디기만 했고, 결국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비가 오거나 다른 일로 집을 비운 나흘을 빼고는 꼬박 매달린 결과라서 더 충격이다.
한번 보시라.(시간은 실질 작업시간)
7. 9 -아침 2시간
7.10 -아침 4시간/출사표 발표
7.11 -비.
7.12 -오전 1시간, 친환경인증 심사
7.13 -오전 4시간, 친환경인증 시료채취
7.14 -오전 3시간
7.15~16 -비.
7.17 -오후 1시간
7.18 -오전 5시간
7.19 -오후 1시간30분
7.20 -오전 4시간
7.21 -오전 3시간
7.22 -오전 5시간
7.23 -오전 4시간
7.24 -오전 4시간
7.25 -오전 3시간
7.26 -오전 4시간
7.27 -오전 5시간
7.28 -오전 5시간
7.29 -오전 4시간
7.30 -오전 4시간
7.31 -오전 4시간
8. 1 -오전 5시간
8. 2 -오전 4시간
8. 3 -오전 4시간
8. 4 -외부행사 참석
8. 5 -오후 2시간
8. 6 -오전 5시간
8. 7 -오전 5시간, 오후 2시간
8. 8 -오전 3시간
8. 9 -오전 4시간
평균 작업시간 4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것이다. 35도를 넘는 더위가 보름을 넘었음을 기억하라. 오후시간엔 아예 작업을 할 수 없다.
오전 4시간이라도 옷은 온통 땀으로 젖고, 물장화 속은 흘러내린 땀으로 찌걱찌걱 정도가 아니라 아예 출렁거린다. 하늘이 노래지고, 다리는 힘이 풀린다.
일이 끝나면 바로 옆 농수로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들어가 다리를 담그고 흙탕물을 씻어내는데 저도 모르게 가뿐 숨을 몰아 쉰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체력의 현주소다. 그렇게 '진검승부'를 했는데도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거꾸로 생각해보라. 고작 네 마지기 지심매는 데 한 달이나 걸릴 줄 알았다면 시작이나 했을까?
한해 농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네 마지기 지심매기에 이렇게 품을 많이 들였다면 그건 차라리 비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척 중요하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묻혀, 그리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전쟁'을 선포해버린 것이다.
그 다음은 뻔하다. 전쟁은 어쨌든 승부를 봐야 하고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게임이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농사는 '자기와의 싸움'으로 변질돼 버렸다. 시간과 싸우고, 더위와 싸우고, 갈증과 싸워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승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한 달 만에.
그렇게 승전하고 나면 그 다음은? 올해 농사가 끝나고 발뻣고 자면 되나?
물관리-피사리-거두기-말리기-방아찧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 상황에서 승전가를 높이 부르며 잔치라도 벌일 셈인가?
대체 승전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기서 승전하면 '적'은 더 이상 발호할 수 없게 되나?
그렇지 않다. 이건 앞으로도 해마다 되풀이 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내년엔 또 다른 피씨앗이 싹을 틔울 것이다.
당장, 맨 처음 피사리를 시작했던 자리로 가보라. 그 곳에는 한 달 전에 싹튼 또 다른 피포기가 성큼 자라나 있다.
지심매기란 결국 사람과 지심 사이의, 떼어 놓을 수 없는 끈질긴 인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뽑아내는 방법이 말고, 아예 싹이 트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악연을 만들지 않는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을 '소탕'하겠다고 나섰으니 '관계'는 사라지고 사람의 '의지'만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지심매기에 마침표를 찍지 않기로 했다.
한때는 깨끗하게 '항복선언'을 할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솔직히 그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고, 왜 굳이 코딱지 만한 넓이를 남겨둘 생각을 했는지 내마음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찜찜함'을 남겨 둠으로써 두고두고 되새김질 하도록?
아무튼 그 한 달 새 많이도 변했다.
무릎에 닿을까 말까 하던 벼포기는 이제 가슴 높이로 자랐고, 하나 둘 이삭이 패기 시작했다.
벼포기 사이를 지나기가 빽빽한 밀림을 헤쳐나가는 느낌이다.
막판에는 피 한 포기 뽑으려면 두 손으로 줄다리기를 해야 할 만큼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땐 보이지 않던 풀벌레들. 그러다가 날개가 돋지 않은 메뚜기들이 보이더니, 이제는 날아다닌다.
어디 메뚜기 뿐인가. 사마귀, 베짱이, 섬서구메뚜기, 이따금 방아깨비, 무당벌레, 침파리, 온갖 거미들과 이름 모를 작은 날것들...
피 한 움큼을 뽑아 땅 속에 밟아넣고 한 걸음을 떼면 후두둑- 온갖 풀벌레들이 화들짝 놀라 한꺼번에 튀어 오른다.
마치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수류탄 폭발과 함께 뻥 터져 튀어오르는 강냉이(팝콘) 같다.
그 와중에도 이름 모를 거미는 벼포기 사이에 거미줄을 쳐 놓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운 나쁜 섬서구메뚜기 수컷이 걸려 든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글을 쓰다가 비가 그친 틈에 백도리 논 피사리를 하고 왔다.
'피반 벼반'이었던 샘골 아랫논과는 달리 세 다랭이 중에서도 맨 윗 다랭이 한 구석에만 몰려 있다.
두어 시간 뽑아내는데, 피가 어찌나 잘 자랐는지 이건 숫제 율무포기를 뽑아내는 느낌이다.
키는 어깨를 훌쩍 넘었고, 줄기가 무슨 가느다란 대나무처럼 빠빳해져 있다.
그 틈새에서 시달려온 벼포기가 어떤 상태인지는 말해 무엇하리오.
옛 사람들은 이 맘 때 쯤 지심매기를 모두 끝내고 호미를 씻어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미씻이, 호미걸이라고 하는데 그 때가 백중 즈음이라고 했다.
해서 백중놀이라고 벼농사 가운데 가장 고된 지심매기를 끝낸 것을 자축하며 온갖 음식을 마련해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데...
그게 음력 7월15일, 올해는 윤달이 끼어 9월1일이지만 예년엔 이 맘때 쯤이었을 게다.
글쎄... 오는 백중날(9월1일)엔 남겨 둔 20~30평 짜리 지심을 마저 매고 잔치나 벌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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