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피 한 포기

2012. 9. 16. 18:31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멫 일 걸리겄네!"

그 어르신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오늘 아침나절에 끝난 모정앞 논 피사리는 일주일이 걸렸다. 이번에도 한 이틀, 길어야 사흘쯤을 예상했는데 결국 '희망사항'으로 끝나고 말았다. 내 가늠자는 이렇듯 늘 터무니없이 빗나간다. 오전부터 비가 내리고, 오후시간엔 생협 생산자모임이 있어 하루를 공친 목요일, 텃밭의 풀을 뽑고 땅을 골라 무우와 배추 씨앗을 뿌린 금요일 오전을 빼고나면 실제로는 딱 5일이 걸린 셈이다. 잔손이 너무 많이 가 짜증이 밀리고,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모정 누마루에 앉으면 이 논이 눈 아래 굽어보인다. 그러니 어르신들의 '농사공론'을 생각하면 울며 겨자먹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작업과정이야 별개 없다. 벼포기를 헤집고 피포기를 찾아 왼손으로 간추려 한 움큼 쥔 다음 낫으로 싹둑 모가지나 허리, 밑동을 베어내거나 벼이삭 위로 솟아오른 놈들의 이삭을 한 가닥씩 잡아 베어내 비료푸대에 우겨넣으면 된다. 이 단순한 작업의 끊임없는 반복. 그것이 이즈음의 피사리다. 이미 일러두었듯, 이 피란 놈의 생명력은 끈질기고도 끈질기다. 뙤약볕 아래 지심매기에서 용케 살아남고, 두번째 피사리 때 이삭부분을 잘랐는데도 그 옆구레에서 다시 이삭을 피워올리는 게 피라는 식물이다. 이거야말로 길고도 긴 숨바꼭질이라 할 만 한다.

 

지난 7월초 모 크기가 한뼘 남짓이던 때, 벼포기 사이에 우거졌던 피포기를 솎아낸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준 바 있다. 지금 보면 '금석지감'이라 할 만 하다. 저리 말끔하던 논에 어찌 오늘과 같은 사단이 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아울러 그 두 달 뒤 '관람'하게 되는 새로운 버전의 비포에프터도 조금은 극적이다. 벼이삭 위로 솟아오른 거무튀튀한 피이삭들이 말끔히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피사리 전

 

피사리 후

 

논에서 베어진 피이삭들은 모정 앞 공터에 수북이 쌓였다. 햇볕에 잘 말려지면 적당한 때 불을 질러 씨앗을 태워버려야 화근을 없앨 수 있다. 이 맘때 피사리를 하는 이유는

결국 내년 농사에 대비해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다. 그러니 말린 씨앗까지 태우고 나서야 피사리를 비로소 끝나는 셈이다.  마지막 피 한 포기를 남겨두고 '기념촬영'이랍시

고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은 건 어인 뜻이었는지...

 

그런데 올해 농사에서 피사리 작업은 아직도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아직도 샘골, 재실, 백도리 논이 줄줄이 남아 있다. 실제로 오전에 모정 앞 논 피사리를 마친 뒤 오후에는 곧장 샘골 논으로 직행했다. 이보다는 덜 하지만 그래도 몇 일 분의 작업량은 족히 된다. 재실과 백도리는 아직 가보지도 못했다.

더욱이 태풍 '산바'의 습격을 앞두고 갈수록 비줄기가 잦아지고, 굵어진다. 내심 초조하다. 별 피해를 남기지 않고 순하게 지나가기를 바랄 뿐, 다른 수가 있겠나...

 

 

 

 

 

▲ 마지막 피 한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