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4. 23:30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나락을 거둬들일 날이 이제 달포나 남았나? 그런데 '벼베기'는 옛말이 되었다. 아니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예 큰 사고다. 콤바인으로 수확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면 어쩔 수 없이 한 포기, 한 포기 낫으로 밑동을 베는 것이다. 어떤 지경일까? 바로 논바닥이 마르지 않아 물이 고이거나 질척할 때다. 그러면 콤바인이 들어가 작업을 할 수가 없단다. 콤바인 작업의 대전제는 바로 논바닥을 바싹 말리는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논바닥을 말려야 하는 이 때, 하필 태풍 '산바'가 비를 잔뜩 뿌리고 지나갔다. 논에는 다시 물이 고였다. 뻘밭을 만들어놓아 피사리 하러 들어서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다. 그러니 이젠 피사리가 문제가 아니게 됐다. 논바닥 말리는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지난 20일에야 깨달았다. 온통 피사리에 넋을 빼앗기고 있다가, 아무리 피사리를 잘 해도 수확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샘골 가운데 논 배수로. 왼쪽이 벼포기를 뽑아내 만든 물길. 오른쪽은 논두렁 아래 배수로.
그날 오전을 '뜻밖의 불안과 혼선'으로 허송한 뒤, 적당히 따뜻한 오후해볕을 받으며 논으로 나갔다. 일단 샘골 가운데 논부터. 위에서 도랑물이 휘돌아 들어오고, 이웃집 논에서도 상당량이 유입된다. 그리고 바로 윗배미에서 내려온 물도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 일단 그 세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점부터 물이 빠져나가는 물꼬까지 반듯하게 물길을 내줘야 한다. 이를테면 '작은 운하'를 파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 자란 벼포기를 두 손으로 쑥 뽑아내서 물길을 내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7~8미터 길이의 물길을 내고 바닥을 골라 물흐름을 만들었다. 이어 논두렁 바로 밑에도 도랑을 파서-역시 벼포기를 뽑아내야 한다-배수로를 만들었다. 이것 만으로도 큰 물길은 잡힐 것이다.
샘골 아랫논 배수로.
다음은 샘골 아랫논. 이미 보름 전에 가장자리를 휘도는 도랑을 친 곳이다. 하지만 이는 윗 배미에서 내려오는 물을 돌리는 구실만 할 뿐이다. 다른 논배미에도 물을 뺄 수 있는 배수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논배미를 하나하나 살피며 가장자리 물길을 파고, 물꼬를 터서 이어주고... 유기적인 배수체계를 갖췄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잡힐 것이다. 그 다음날도 작업은 맨 아랫배미에 집중됐다. 가운데 쪽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탓이다. 다른 수가 없다. 거기서부터 물이 빠져나가는 물꼬까지 물길을 이어줘야 한다. 방법도 한 가지다. 벼포기를 뽑아내 작은 운하를 파는 것이다. 이번엔 그 길이가 15미터 쯤 된다. 아침나절로도 모자라 오후시간에도 작업이 이어졌다. 그제서야 물길이 잡히는 조짐이다.
그 다음날,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은 백도리 차례였다. 아뿔싸! 거의 배 띄울 지경이 되어 있다. 물대기 할 때 막아놓았던 물꼬를 그대로 뒀으니 빠져나갈 틈이 없는 건 당연한 일. 정신없이 막힌 물꼬를 트고, 멀쩡한 논두렁을 여기저기 파내 새 물꼬를 만들었다. 높이 2~3미터의 논두렁에서 물이 쏟아져내리니 마치 작은 폭포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온 물을 받아 밖으로 빼내는 도랑이 막혀 있다. 온갖 풀줄기와 풀뿌리에 절고, 오래된 유기물이 엉켜 있는 탓이다. 그러니 도랑은 무용지물이요, 맨위 다랭이(3층) 물을 가운데 다랭이(2층)로 퍼내는 꼴이다. 이 경우, 도랑을 파내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 이를테면 작은 준설작업인 셈이다. 낫으로는 얽히고 설킨 '고마리'라는 풀줄기를 쳐내고, 괭이로는 바닥을 퍼냈다. 풀줄기가 억세고 쌓인 유기물이 많아 금새 비지땀이 흐른다. 게다가 풀줄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낫자루까지 부러지고 말았다. 한 10미터 정도 준설작업을 하고 나니 사지에서 힘이 쭉 빠진다.
문제는 2층 자체로도 이미 물이 흥건하다는 것. 여기선 오른쪽 계곡으로 물꼬를 트고, 물이 괸 논 한복판을 작은 운하로 연결하는 방법을 썼다. 벼포기를 뽑아내 만든 물길이 10미터 남짓. 예상했던 대로 물을 시원스레 빠져나간다. 이제 맨 아래 다랭이(1층). 여기는 오른편으로 물이 한강이다. 그래서 일이 좀 쉽게 됐다. 바로 옆 계곡쪽 논두렁을 깊이 파내 물꼬를 냈다. 물이 콸콸 쏟아진다. 거기까지 하고 나니 거의 기력이 남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논바닥을 말리기 위한 기본적인 배수체계는 모두 갖추게 됐다. 다시 비만 오지 않는다면 논바닥이 질어 콤바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거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겠지...
백도리 3층 논두렁에 물꼬를 내니 이렇듯 작은 폭포를 이뤘다.
'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 > 여름지기의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구치기'의 달인? (0) | 2012.10.04 |
---|---|
오늘도 '운하'를 파고 왔다 (0) | 2012.09.27 |
텃밭, 그 나머지 절반에도 씨를 뿌리다 (0) | 2012.09.24 |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피 한 포기 (0) | 2012.09.16 |
세상에서 가장 질긴 놈... 그대 이름은 피! (0) | 2012.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