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7. 00:13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고 말았다. 논바닥 말리는 일 말이다. 가을걷이까지 한 달 넘게 남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늦어도 10월 중순까지는 나락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얘기를, 콤바인 가진 동네 어르신한테서 들었다. 논바닥을 잘 말려야 한다는 얘기도 덤으로. 그것이 오늘 오후다.
어차피 따로 얘기를 할 거리지만, 사실 요즘 큰 아이 때문에 '비상' 걸렸다. 오늘도 오전엔 아이 학교일에 매달리다가 점심은 전주시내에 가서 먹고 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한 시간 남짓, 느긋하게 자루가 부러진 쇠갈퀴를 고쳤다. 자루가 조금 깡똥해지긴 했지만 너끈히 쓸 만하다. 이렇게 한 건 했으니 이젠 본업(?)을 향해 논으로 나가봐야지. 자전거에 오른다. 갈 곳은 뻔하다. 학교앞, 모정앞 논은 이미 바싹 말라 있으니 볼 것도 없고, 나머지 샘골, 재실, 백도리 세 곳이 문제다.
샘골. 괭이를 들고 둘러보니 문제가 분명해진다. 저 위에서부터 계속 내려오는 물을 흘려보내는 우회수로는 이미 완료돼 있다. 문제는 그것과 상관없이 논 가운데에 오래도록 고여 있는 물. 시간이 지나면 햇볕을 받아 증발하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처음부터 많이 고여 있던 곳은 오늘까지도 흥건한 채 줄어들지 않았다. 물길을 만들어 밖으로 빼내는 수밖에 없다. 물길 만드는 방법은 하나다. 벼포기를 뽑아내는 것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그걸 '도구 친다'고 한다. 도구란 '물곬'을 가리킨다. 논 가운데 만드는 물길이다. 물이 유입되는 지점부터 빠져나가는 지점까지 도구를 쳐서 물길을 이어가는 것이다. 앞서 이를 '운하건설'에 견준 바 있다. 누군가는 '한반도 대운하'를 들먹이다가 반발이 거세자, '4대강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구질구질하게 해치우더니 태풍이 몰고온 집중호우 한 번에 그 무모함이 드러나고 말았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하지만 내 경우는 정반대, 생각지도 못했던 운하를 파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지금껏 '준설작업' 말고도 일부러 파낸 '운하'가 몇 개 던가. 그런데 아직도 모자라는 거 아닌가.
샘골 가운데 논, 윗 배미에 새로 낸 물곬.
샘골 가운데 논. 이미 아랫 배미에 허리를 가로지르는 '운하'와 논두렁을 따라 흐르는 '운하' 두 개를 판 상태다. 그런데 윗 배미에 고인 물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겠거니 생각했는데 오늘도 그대로다. 물이 유입되는 지점부터 논두렁을 따라 '운하'를 파서 아랫 배미 유입구로 이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길이 7~8미터의 물곬이 윗 배미에도 생겼다. 가운데 논, 두 배미에 '운하' 세 개를 판 셈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듯 여전히 수량은 엄청나다.
샘골 맨 아랫 배미. 위에 내려오는 물을 받아내는 도랑과는 별개로 논 가운데에 고여 있는 상당량의 물을 빨리 빼내야 했다. Y자 물길 중 왼쪽이 기존의 도랑, 오른쪽이 오늘 파낸 물곬.
이젠 샘골 맨 아랫 배미 차례다. 논 가운데에 고여 있는 물이 몇 일이 지나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젠 더 기다릴 수 없으니 인위적으로 빼내야 한다. 어찌할까 고심하다가 사진에서 보듯, 일단은 기왕의 도랑에 물곬을 연결하기로 했다. 도랑에서 물이 고여 있는 지점까지 5~6미터 정도 짧게 도구를 쳤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물길이 이어져 물이 빠져나왔다. 일단 이 정도로 해 두고 이후 경과를 보니로 했다. 이렇게 해서 샘골은 전반적인 배수체계와 고립지점의 물곬을 갖추게 되었다. 남은 건 시간, 그것이 문제다.
백도리 아랫 배미. 한쪽에 흥건히 고여 있는 물을 빼내기 위해 도구를 쳤다.
약간 피로감이 들었지만 백도리로 자전거를 몰았다. 주변 풍경은 이제 가을 빛을 띠기 시작했다. 백도리 논은 세 다랭이로 되어 있는데, 세 곳 모두 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상태다. 1층과 2층은 계곡 쪽에 고여 있던 물은 물꼬를 내면서 모두 빠졌는데, 그 맞은편과 가운데가 문제였다. 1층은 물이 가장 많이 고여 있는 지점을 골라 도구를 쳤다. 사진에서 보듯 세로면을 완전히 가로질렀다. 해서 물곬로 고인 물이 도로쪽 물꼬로 빠져나가게 하자는 것이다. 이 곳만 빠지면 1층의 배수는 완료된다. 2층도 여전히 물이 제법 고인 지점이 있었는데 밖으로 빼낼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어 그저 가장자리 쪽으로 빠져나와 고이게만 해 두었다.
백도리 맨 위(3층) 다랭이 물곬.
가장 골칫거리는 3층 다랭이. 피가 우거진 뒷부분에는 흥건히 고여 있는 데다가 윗쪽에서 적잖은 물이 계속 흘러들고 있었다. 지형상 길다란 물곬을 내서 2층 도랑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깊은 숨 한 번 들어마신 뒤 도구치기에 들어갔다. 대략 20~30미터에 이르는 물곬을 냈다. 'ㄷ'자 모양으로 물길이 만들어졌다. 수량이 많아 흐름이 세차다. 이로써 오늘 하루만 네 곳이나 '운하'를 판 셈이 됐다. 일이 고되지는 않았지만 진창 속에서 일하는 느낌은 영 끕끕하다. 물것들이 달려들어 팔을 쏘는 바람에 따끔하고 아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깥밤실 들머리에 이르러 마주친 어르신이 반갑게 눈웃음을 짓는다.
"아이고 피사리 박사님! 피사리 허고 오는겨?"
"아뇨, 피사리는 포기했고, 논바닥 말리려고 물빼고 오는 길이에요"
"잉~ 도구쳤고만"
"한 열흘이면 마를랑가요?"
"열흘? 그거 갖고는 안 될 틴디..."
뭣이라... 열흘 갖고도 안 된다고? 거참, 그럼 대체 어찌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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