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7. 17:56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여기로 이사온 지 두 해 남짓이 되는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시내버스라는 걸 타봤다. 정확히는 두번째다. 첫번째는 이사오고 두 달 쯤 됐을 때다. 그나마 그 때는 새로 산 승용차을 인수하러 전주시내로 갔던 길이다. 따라서 통행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무효!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읍내 병원에서 약을 타는 날이었다. 그런데 우리집 모녀가 전주시내에 볼 일이 있다며 승용차를 끌고 나갔다가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저녁 늦게나 들어올 수 있단다. 이거 낭패다. 전에 없던 변고다. 병원 문 닫기 전에 도착하려면 다른 교통수단을 강구해야 할 상황. 그런데 읍내까지 거리라 해봤자 고작 3Km 남짓이다. 자전거로도 10~20분 거리고, 정 안 되면 걸어가도 그만이다. 하지만 승용차로 오가던 버릇이 있어 그건 잘 상상이 안 간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고, 엊그제부터 강추위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 다시 전화를 걸어 좀 더 빨리 올 수 없으냐고 '애원'했더니만 "정 그러면 시내버스를 타라"는 거다.
그렇지, 시내버스가 있었군.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추운 거리로 나섰다. 처음 시내버스 탔던 때를 떠올려봤다. 차삯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일단 잔돈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뒤져도 만원 짜리 뿐이다. 차삯으로 낼 잔돈을 마련하겠다고 승용차를 끌고 읍내로 나가 일부러 장을 보왔다. 그렇게 잔돈을 챙겨 버스를 기다리는데 배차간격이 얼마인지... 듣기로는 20분마다 선다고 했는데 마침 전주시내버스가 파업 중이니 그보다 길게 뻔했고... 아무튼 얼마를 기다려 버스에 올랐는데, 어라? 여기도 카드 단말기가 달려 있는 게 아닌가? '멘붕'... 시골버스란 생각만 했지, 전주시내버스가 군지역까지 연장운행된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다. 설령 그걸 알았더라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았겠지만. 아무튼 기사 양반에게 버스비가 얼마인지를 물어서 요금함에 잔돈을 넣었던 기억.
오늘은 신용카드가 든 지갑을 챙기고, 혹시 몰라 잔돈도 준비했다. 10분 남짓 기다리니 버스가 굴러온다. 올라타서 카드 단말기에 지갑을 들이대니 '삐-' 소리와 함께 천 몇 십원이 뜬다. 2년이 흘렀다지만 아직은 익숙한 상황이다. 음... 그렇군!
병원에 들러 처방전을 받은 뒤 약국에서 한 달 치 약을 받아서 버스터미널(차부) 쪽으로 향한다. 아까 타고 온 300번 버스가 곧 회차하지 않을까 싶어 종종 걸음. 그런데 터미널에 주차된 버스들은 움직임이 없다. 터미널 빵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바로 앞으로 지나던 흰색 미니밴에서 차창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멈춰 선다. 차문이 열렸는데 둘째 녀석이 거기서 빠져나오며 나를 부른다. 읍내 태권도장에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날 더러 빨리 타란다. 시내버스에 정신이 팔려 잠시 어리둥절 했다가는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미니밴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여성 사범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았다. 태권도복에 겨울잠바를 걸친 아이들 셋이 타고 있다.
화석연료의 힘은 역시 대단하다. 걸음으로 30분 거리를 단 3~4분으로 단축했으니 말이다. 다른 한편으론 이제 자가용 차량 없이는 살기 힘들게 된 시골을 생각한다. 5일장이 서는 날, 자전거에 씨암닭 한 마리와 달걀 몇 꾸러미를 싣고 나왔다가 먼 동네 친구 마나 막거리 몇 잔에 발그래진 얼굴로 느릿느릿 장마당을 구경하는 촌부를 떠올리는가? 아니면 몇 가지 푸성귀가 담긴 광주리를 들고 시내버스에 올라 타 큰 소리로 수다를 떠는 할머니를 생각하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요즘 농사꾼의 차량은 기본이 석 대다. 승용차, 트럭, 트랙터. 여적 SUV 한 대로 밍기적대는 농사꾼은 우리집 밖에 없을 거다. 하긴 이번 겨울 안으로 중고 트랙터에, 여차 하면 트럭도 장만할 생각이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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