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강변풍경

2013. 1. 3. 14:58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지난 28일부터 큰 눈이 내려 수북하게 쌓인 뒤로는 본의 아니게 '두문불출'이다. 바람이나 쐬어볼까 문밖을 나서도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은 뒤축을 꺾어 신은 신발 속을 파고 든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울안을 맴돌며 마을 뒷산과 허연 들판으로 눈길을 던질 뿐이다. 그래도 눈덮인 산하는 장엄하다. 아주 짧은 순간, 턱하니 숨을 멎게 한다. 

 

어제부터는 햇살이 따사로워 졌는지 차도에 쌓인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차바퀴가 지난 자리는 아스팔트가 드러났고, 길섶은 눈이 녹아 거무튀튀 진창으로 둔갑해버렸다. 하도 오랜만에 문을 나선지라, 역시 꺾어 신은 차림으로 찻길을 따라 저만치 강변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그렇게 50미터 남짓 걸으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너머가 바로 만경강이다. 오래전부터 보(어우보)가 있어 언뜻 보면 호수로 보일 만큼 물길이 넓다. 갈대가 뿌리를 내린 하중도(河中島)도 듬성듬성 눈에 들어온다. 삼거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그러나 두어 달 전만 해도 이 곳 풍경은 사뭇 달랐다.

 

  

이곳은 애초 수 십 년 동안 가게 건물이 터잡아 전망을 가리고 있었다. 건물로는 세 채였고, 가게 수로는 다섯 개였다.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가게가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자동차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매기가 끊겼으리라. 한 때 가설극장까지 있었다는 읍내 시장통도 빈 가게가 즐비한 마당에 이 한적한 동네의 가게야 더 말해 무엇하리오. 아무튼 이 건물은 그 쓰임새가 살림집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대부분 비어 있고, 다섯 곳 가운데 한 두 집에만 사람이 살았다. 워낙 날림으로 지은 시멘트 벽돌집이라 너무 낡은 탓이었다. 한쪽은 지붕이 내려 앉은 채였고, 빈 가게는 출입문 유리창이 왕창 깨진 채 방치돼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흉가'로 보일 만 했다.

 

그나마 지난 여름, 초대형 태풍 볼라벤이 전국을 할퀴고 간 뒤 이 건물은 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낡아빠진 데다가 텅빈 강가에서 세찬 바람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오죽했겠나. 스레이트 지붕은 날아가고, 벽채도 크게 손상됐을 터다. 태풍이 지난 몇 일 뒤, 집 앞에는 이삿짐이 쌓여 있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세를 살던 이들에게는 태풍피해 보상비로 얼마 안 되는 이사비용이 나왔다고 한다. 아울러 집터는 원래 하천부지로서 국유지이니 건물소유자에게 어떤 보상이 돌아갔느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 얼마 뒤 건물 철거공사가 시작됐다. 스레이트 지붕 때문인지 노동자들이 방독마스크에 방제복을 입고 작업을 했다. 철거작업 사나흘 만에 강가에 버티고 섰던 가게건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건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자리에 탁트인 강변풍경이 들어섰다.

 

 

 

  건물을 다 헐어내고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건물 잔해를 깨끗이 쓸어내고 평탄작업도 해야겠지 싶었는데, 그 자리에 뭐가 들어서는지 궁금했다. 마을 이장님을 만난 김에 물어봤더니 '화단'을 만든다고 했다. 굴삭기를 비롯해 중장비 두 어 대가 연일 뽁작뽁작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창문 너머로 그 쪽을 바라보니 언뜻 지붕 같은 게 비쳤다. 날이 어두워 그게 무언지 더는 알 수가 없었고... 날이 밝고 그 곳의 자태가 드러났다. 온갖 공사자재가 널려 있고, 중장비가 털털대는 소리도 귀에 거슬려 그 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더니 결국 조그만 '체육공원'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정자와 소나무 서너 그루, 운동기구 몇 가지, 자주색 잎의 조경관목...  흔히 볼 수 있는 가로공원이다. 하긴 뭘 더 어찌 할 수 있었겠나 싶다. 탁트인 강변풍경이 몇 십 년만에 다시 살아난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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