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7. 19:41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 올해 농사가 시작됐다.
물론 전통적 농사라면 지금은 농한기 한복판이다. 아직 설도 지나지 않았고, 땅바닥은 꽁꽁 얼어 괭이를 튕겨낸다. 그러니 지금은 '놀고먹는' 농한기라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게 다 그 잘난 석유문명 덕분이다. 비닐이 농사에 도입되고 시설재배가 흔해진 오늘, 농사짓는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당장 농한기라는 말 자체가 퇴출될 지경 아닌가. 무엇보다 농사의 질서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었다. 늦봄에나 맛볼 수 있었던 딸기를 한 겨울에 수확하고, 잎채소는 철을 가리지 않는다. 시설재배가 아니라도 씨뿌릴 수 있는 시기는 훨씬 당겨졌고, 거둬들이는 시기는 반대로 더 늦춰졌다. 비닐하우스에서 모종을 기르거나 사다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십 년을 이어오다 보니 이제는 '재래농법'이 되레 아주 드문 경우가 되었다. 해서 '자연농업'을 좇는다 해도 새로운 질서를 넘어서기엔 한계가 있다.
사설이 좀 길어졌는데, 두 시가 조금 넘어 전화를 걸어온 운영 씨가 고추모종 기를 땅을 고르잔다. 원래 월요일 오후에 씨를 붓기로 했었다. 그런데 모종밭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정지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쩔겨, 가봐야지... 바깥공기가 찹지만 길바닥이 미끄럽지 않아 자전거에 올랐다. 열두발 쇠스랑을 '비껴들고' 2Km 쯤 떨어진 운영 씨네 비닐하우스로 향한다. 이태전, 보조를 받아 종묘육성 전용으로 지은 것이다. 헌데, 지난 가을 태풍 볼라벤을 정통으로 맞아 엿가락처럼 휘어버렸다. 그렇게 널브러져 있던 것을 전문업체에 맡겨 어제까지 사흘 동안 복구했단다. 우리가 고추모종을 키울 곳이 바로 이 비닐하우스다.
우리는 올해 1천5백평 고추농사를 짓게 된다. 그제, 운영 씨네와 주란 씨, 얼마전 행복한 농장(http://cafe.naver.com/gshappyfarm)에 합류한 정원 씨와 점심을 함께 하며 계획을 짜고 대책을 의논했었다. 사실 나로서는 이같은 상황전개가 좀 거시기하다. 내 '전략종목'인 벼농사는 경작면적이나 작부계획이 아직 불투명한데, 생각지도 못한 고추농사를 공동경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난해 어떨결에 벼농사를 시작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인 셈. 고추농사가 거북해서가 아니다. 1천5백평이면 고추농사 치고는 엄청난 넓이인데 필요한 만큼 품을 나눠댈 수 있을지 걱정되는 탓이다. 아울러 '공동경작'에 따른 어려움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은 것도 껄쩍지근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만들어내고 예까지 끌어온 주란 씨는 기대에 부풀어 있고, 의지도 무척 강하다. 그 기세를 어찌하지 못하고 거의 떼밀려 가고 있는 형국이랄 수 있다. 에잇! 어찌되겠지...
우리가 할 고추농사는 기본적으로 친환경 유기농에 자연재배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음은 물론이고, 자연생태를 해치는 비닐멀칭 같은 기법도 피하자는 것. 생분해성 비닐을 구할 수 있다면 혹 모를까... 그런데 이미 비닐하우스에서 모종을 기르기로 했으니 그건 어찌봐야 하는지 좀 혼란스럽긴 하다.
아무튼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오늘, 고추농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비닐하우스에 도착하니 주란 씨와 사리 씨가 낫을 들고 땅바닥에 말라붙은 풀더미를 걷어내고 있다. 비닐하우스를 복구한지 하루 밖에 안 된 탓에 땅바닥은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다. 흙을 고를 수가 없는 상태다. 대충 풀더미를 걷어내고 나서 고추모종 부을 자리에 비닐터널 만드는 작업으로 넘어갔다. 굵은 철사로 뼈대를 세우고, 밤시간에 최소한의 온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전열선을 매달았다. 이 또한 '자연농법'과 거리가 있다.
아무튼 올해 농사는 이렇게 첫삽을 뜬 셈이다. "새해 첫 등산 때 '시산제' 하듯 우리도 '시농제' 해야 하는 거 아냐?" 운을 뗐더니 주란 씨가 "그럼 막걸리라도 한 잔 할까요?" 대뜸 받는다.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 운영 씨가 화들짝 놀라 쐐기를 박고 나선다. 그러고 보니 내일 씨앗을 붓고 나설랑 그리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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