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묻지마 관광'으로 보이니?

2013. 1. 25. 09:59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아직 설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농한기'의 끝이 보인다. 물론 농사준비에 들어간 건 아니고, '머리와 마음의 몸풀기'가 시작됐다는 얘기다. 그것도 한꺼번에...

 

당장 오늘, '친환경 수도작 작목반 선진지 견학'이라는 이름으로 전남 벌교를 다녀왔다. 이게 대체 뭔 말인지 한참 들여다본 사람이 적지 않은 게다. 아직도 농사꾼마저 알아먹기 힘든 용어를 써야 하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수도작(水稻作)은 벼농사를 말한다. '고추 작목반'이나 '딸기 작목반'처럼 그냥 '친환경 벼 작목반'으로 쓰면 어디 덧나나... '선진지(先進地)'는 또 뭔가. 선진국이 있으니 선진지도 없으란 법은 없겠지만 좀 심하다. 아무튼 엊그제 이곳 고산농협에서 연락을 받았다. 가게 되는 '선진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벌교란다.

 

벌교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여수 가서 돈자랑 말고, 순천 가서 인물자랑 말 것이며, 벌교 가설랑 주먹자랑 말라는 그 유명한 얘기와 꼬막이 그것. 그런데 친환경 벼농사라? 전화를 걸어온 농협 직원이 설명을 덧붙인다. "거기 가면 친환경 벼농사를 맨 처음 시작한 농가가 있다네요." 알았노라고 참가하겠노라고 대답을 해놓고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설핏 짐작이 가는 게 있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역시 맞다. 강대인. '친환경 벼농사'라 했을 때 자연히 뒤따르는 게 '오리농법' '우렁이농법' '태평농법' 따위와 더불어 '강대인'이라는 이름이다. 나 역시 이미 <강대인의 유기농 벼농사>란 책을 사 놓고도 차일피일 미뤄오고 있었던 터다. 어떤 고장을 이를 때 시군 단위로 표기하는 관행에 따라 강대인은 흔히 '보성'에서 농사 짓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연락을 받고 두어 시간 지난 뒤 이번엔 마을 이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모레 오후 한 시에 농업기술센터에서 벼농사 교육이 있는디 안 가볼텨?"

"엥? 목요일 아녜요?"

"이~, 목요일 오후 한 시"

"그 날 친환경 견학 간다고 해서 신청했는데... 어찌 날짜를 겹치게 잡았대요?"

"그러게 말여... 거기 신청혔으면 헐 수 없지, 그럼 견학 잘 댕겨와!"

"예..." 

좀 황당하다. 뭔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농사꾼에게는 견학과 교육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날짜를 겹쳐 잡으면 어쩌란 말인가. 분신술을 써서 둘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벼농사 교육은 지난해에도 받았으니 견학을 가는 게 낫지 싶었다.    

 

'새벽밥' 먹고 8시에 농협 앞으로 갔다. 45인승 전세버스가 꽉 찼다. 대부분 일흔 이쪽저쪽이고, 50대 '청년'은 나를 비롯해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 할머니 급 아주머니도 여남은 눈에 띈다. 버스 안에 설치된 TV에서 방영되는 아침드라마를 아주머니들이 뚫어져라 보고 있다. 이윽고 버스가 움직이고, 새벽잠을 설친 탓인지 스르르 잠이 온다. 버스는 두 시간 남짓 달려 보성군 벌교읍 마동리에 다다랐다. '우리원'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흔히 우리나라 친환경 벼농사의 선구자라 불리는 강대인은 몇 해전 작고했고, 지금은 부인 전양순 씨가 맥을 잇고 있었다. 일흔이 가까워 보였지만 다부진 몸매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사업현황을 설명했다. 맨 먼저 도정공장에 들러 영양파괴를 최소화하는 복잡한 설비와 진공포장 시스템을 소개했다. 이어 매실을 비롯해 각종 산야초 발효액을 숙성시키는 저장시설, 친환경 농기계창고, 나락 건조시설로 안내했다. 2층건물인 '친환경농업 교육관'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강대인의 '생명역동농법'의 기원과 기술 등을 일러주었다. 그 가운데서 제초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논물관리법 같은 몇 가지는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강대인 표 생명의  쌀'로 지은 밥과 천연재료로 만든 반찬으로 점심을 먹었다. 벌교땅이라 꼬막요리로 통꼬막과 초무침이 나왔다. 나는 어릴 적 뭍에서 자란 탓에 갯것에 익숙치 않다. 때문에 작가 조정래가 <태백산맥>에서 꼬막요리를 워낙 '찰지게' 묘사한 덕에 그 환상을 먹을 뿐, 솔직히 그 맛은 잘 모르겠다. 

 

오후 프로그램으로 '친환경 인증제도'에 대한 재미없는 강의를 끝으로 견학은 끝이 났다. 이런 류의 견학 프로그램에는 반드시(!) '명소 탐방'이 끼게 돼 있다. 설마 했는데, 버스가 범춘 곳은 다름 아닌 순천만 생태공원. 헐~ 이미 달포 전에 완주문화원 주최로 '생태답사'를 했던 곳이다. 날씨까지 잔뜩 찌푸려서 갈대밭의 풍광을 즐기기도 마땅찮은 데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40분. 생태공원 입구를 잠깐 둘러보았을 뿐이다.

 

전세버스가 이윽고 귀로에 올랐다.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 무사히 일정을 끝냈으니 이제 뒤풀이 시간이다. 옆자리에 앉은 어르신이 술을 못한다니 뻘쭘하게 캔맥주를 홀짝였다. 부녀회장은 좁은 통로를 오가며 연신 술을 권하고, 동행한 농협 직원 둘은 닭튀김에 오징어포, 견과류 같은 안주를 대기 바쁘다. 그렇게 술잔을 주거니 잣거니 할 때만 해도 잠시 뒤 벌어질 일을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까,  왁자하던 차내에는 비트가 강한 '디스코 매들리'가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TV화면에는 반라의 무희들이 몸을 흔들고 있다. 뮤직비디오를 튼 모양이다. 이게 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준비운동'.

 

30분쯤 지나 술기운이 얼큰해질 즈음 마침내 춤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묻지마 관광'... 버스 천정에선 휘황찬란한 7색조명이 번쩍이고, 볼륨을 한껏 올린 비트 강한 음악은 고막을 울려댄다. 부녀회장은 앉아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 끌며 바람을 잡고, 게 중에 젊은 축에 드는 아낙과 청년 두엇이 동을 떴다. 농협 직원 둘도 끝까지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는 듯 열심이다. 70줄에 들어선 어르신들은 '내가 60줄만 됐어도...' 하는 아쉬움을 드러내며 그저 바라볼 뿐이고. 볼륨은 더욱 올라가 버스를 쿵쾅대고, 어느 순간 좁은 통로가 여남은 명 춤꾼들로 들어찼다. 

 

'광란의 춤판'은 아쉽게도 핸드폰 밧데리가 떨어져 찍지 못했다. 그래도 그 광경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30~40대 시절부터 몸에 밴 패턴일 게다. 고작 한 두 시간, 이들에게 허락된 살풀이, 한풀이 기회다. 달리는 차 속뿐만이 아니다. 여전한 지는 모르지만 솔밭을 낀 강변이나 이름난 정자 주변에 터를 잡은 유원지에는 '1호' '2호'... 문패가 붙은 가건물에서도 이런 춤판이 벌어졌다. 한동안 이게 무슨 엄청난 '탈선'이라도 되는 양 온갖 언론매체가 거품을 문 적이 있었다. 물론 빠르게 달리는 차안이라 좀 위험한 점은 있지만 여기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 훈계하는 건 어찌보면 낯뜨거운 짓이다. 이 점잖은 신사들의 '여흥문화'는 또 어떨지 궁금하다. 지난 대선에서 농업-농민부문 공약을 내놓은 후보가 아예 없었다고 하고, 그 잘난 언론들 또한 농업-농민 문제는 관심 밖이다. 차라리 이렇듯 해오던 대로 '냅두는 게' 도와주는 거다. 관심을 가질까봐 되레 겁난다. '소수정예 기업농 육성'이라는 농업정책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저들이 손대고, 입대는 자체가 대다수 소농들을 못살게구는 짓이 될 것이기에.

 

아무튼 춤판을 실은 버스는 달릴 뿐이고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음악이 꺼지고 작목반장이 마이크를 잡았지만 열기가 쉬이 식지 않는다. 마무리발언이 계속 끊긴다. 그래도 어쩌랴. 아쉬움이 남으면 남은 대로 모두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버스를 내리니 그새 눈이 조금 쌓여 있다. 전화가 울린다. 주란 씨다. 고추모종을 어찌할지, 그리고 고추농사 일을 어떻게 나눌지 내일 만나 의논하잔다. 역시 농한기는 끝났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