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새밭'을 꾸몄다오!

2013. 5. 12. 18:48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오늘은 토-일요일, 주말이다. 그 이틀을 남새밭 만드는 데 몽땅 바쳤다.

 

남새...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야채나 채소 하면 아하! 할 사람이 제법 있을 게다. "야채(野菜)는 일본식 표현이니 채소(菜蔬)로 쓰자"고 했거늘, 채소 또한 한자말이다. 그렇다면 야채(채소)를 뜻하는 순 우리말은 뭔가 했을 때 '푸성귀'가 있다. 또 하나 '남새'가 있는데, 흔히 북한에서 아이스크림을 '어름보숭이'라 하듯, 야채나 채소를 우리말로 순화한 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남새'가 이북에서만 쓰는 말은 아니다. 물론 '남새'만으로 썼던 기억은 없지만 '남새밭'이란 말은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집 주위에 있는 밭을 흔히 '텃밭'이라고 한다. 집 터에 붙어 있는 밭이란 뜻이다. 도시사람에게 '주말텃밭'이 많이 보급된 요즘, 텃밭은 채소밭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텃밭에 채소만 심었던 건 아니다. 물론 텃밭이 작으면 그럴 공산이 크다. 이 때는 파, 마늘, 풋고추, 생강 같은 양념채소와 무, 배추, 부추, 상추, 아욱, 쑥갓, 시금치 같이 늘 먹는 채소부터 가꾸 게 마련이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 이런 채소를 심은 곳을 '남새밭'이라 불렀다. 텃밭이라 해도 땅이 넓은 집에서는 콩이나 참깨, 들깨, 고추, 감자, 고구마, 담배... 따위 돈이 되는 '환금작물'을 기르게 마련이었다. 요컨대 '남새'라는 개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남새밭'이라는 용어 속에 녹아 있었던 셈이다. 북한에서는 이 점에 착안해 야채-채소를 대신할 고유어로 '남새'를 창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시골에 산다고 날마다 먹는 푸성귀가 그냥 생기는 건 아니다. 이 또한 작물인지라 작부'계획'이 필요하다. 밭을 만들어야 하고, 씨앗이나 모종을 구해 뿌리고 심는 수고를 들여야 자급이 되는 것이다. 물론 맘씨 좋은 이웃을 두었다면 얼마간 얻어 먹을 순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야 언제까지 입만 갖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한편 작물이 아닌 '자연산'을 채취할 수도 있다. 양력 4~5월을 거치며 들로, 산으로 나서면 온통 나물 천지다. 냉이, 달래, 쑥, 씀바귀 같은 들나물에서 두릅, 취나물, 머위, 고사리 같은 산나물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많다. 이 또한 거저가 아니다. 날짜를 빼야 하고, 새벽부터 행장을 차려 나서 적잖은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체로 여성들이 '들나물 캐고, 산나물 꺾는 일'을 즐기는 듯 하다. 우린 돈 주면서 하라고 해도 그닥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일이지만.

 

사설이 많이 길어졌는데, 어제-오늘 자급용 남새밭을 꾸몄다는 얘기를 하려다 보니 관련된 얘기가 고구마 줄기처럼 끌려나왔다. 우리는 집도 세들어 살지만, 벼농사 짓는 논은 물론이고 텃밭도 내땅 한 뙈기가 없다. 때문에 아내는 "시골 살면서 지어먹을 텃밭 한 뼘이 없다"고 늘 울쌍이었다. 자기는 시골에 내려가더라도 절대 농사짓지 않겠다더니만 막상 자연 속에 살다보니 사람의 '본성'을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들나물 캐고, 산나물 꺾는 일 만큼이나 남새밭 챙기는 '아기자기한' 일이 성미에 안 맞는다. 사실 전통 농촌사회에서 '농사 짓는다' 했을 때, 그것은 대체로 논농사, 다시 말해 벼농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도 만찬가지다. 축산이나 시설채소, 특용작물 따위는 '농사' 축에 끼지 않는다.

 

요컨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큰 맘 먹고' 남새밭을 만들게 됐다는 말씀. 한 달포 쯤 됐던가. 옆집 정수 씨가 굴삭기를 빌려 뒷담과 텃밭 사이에 물길을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큰 비가 내리면 빗물이 밭 아래 있는 담장을 넘어 집으로 넘쳤던 모양이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남새밭으로 쓸 땅을 조금 떼어달라고 부탁했다. 정수 씨는 농사가 본업이 아니다. '시니어클럽'이라고, 어르신들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익법인에서 근무하면서 자투리 시간에 농사를 짓는 거다. 그러다보니 3백평 남짓한 텃밭을 가꾸는 일이 그리 녹록치가 않아 땅을 알뜰히 활용하지 못하고 처지다. 따라서 텃밭을 조금 떼어달라는 건 전혀 무리한 부탁이 아닌 셈이다.

"그러세요!"

선선히 대답했던 정수 씨는 며칠 전 트랙터로 로터리 작업을 하면서 우리집이 남새밭으로 쓸 만한 땅도 함께 갈아 놓았다. 아네한테는 그것도 벅찰 듯 해 그 2/3 정도만 밭으로 꾸몄다. 한 20평이나 될까? 괭이로 배수로를 파고, 거름을 뿌린 뒤 이랑을 만들어 뒀다.

 

'손바닥 만한 텃밭' 텃밭 너머로 보이는 게 정수 씨네 집이다.

 

오늘 아침, 여유를 찾은 아내가 남새밭 일을 하자고 성화다.

"뭘 심을 건데?"

"글쎄...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들깨, 고추... 또 뭘 심지?"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들도 끼어든다.

"있잖아요, 수박하고 참외, 딸기도 꼭 심어주세요!"

 

나참, 손바닥 만한 땅에 꿈도 야무지다. 감자는 이미 심을 시기가 지났고, 고구마나 옥수수는 그 땅에 몽땅 심어도 모자란다. 참외, 수박은 넝쿨을 넓게 벋어서 땅을 많이 차지한다. 어미와 아이들의 '철없는 소망'을 깨우쳐주고는 현실적인 '작부체계'를 제시한다.

"옥수수는 가장자리에 울타리 삼아 한 열 그루 심고, 들깨는 해충 방지용으로 역시 빙 둘러 심고... 첫 이랑엔 상추, 쑥갓, 아욱, 둘째 이랑은 대파, 셋째 이랑은 배추와 열무, 한쪽에는 풋고추 따먹을 고추 10주와 오이, 가지를 심을 겨!"

 

 

물론 옥신각신 뒷말이 이어졌지만 준비된 모종과 씨앗이 그것 뿐이니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옆집 정수 씨가 호박과 옥수수 모종을 조금 갖다줬고, 대파와 상추, 들깨는 지난해 해먹은 텃밭에서 떠왔다. 여기에다 엇갈이 배추, 쑥갓, 아욱, 상추 씨를 뿌리고 오이, 가지 모종을 옮겨 심는 것으로 남새밭은 대충 모양을 갖췄다. 지난해보다는 작목이 훨씬 늘어났다. 무엇보다 바로 집 뒤곁이어서 맘에 든다. 지난해는 여덟집이 동네 한가운데 있는 밭을 빌려 '공동텃밭'을 일궜었다. 하지만 아내는 딱 한 번인가 열무를 갈무리해 온 뒤로는 발길을 딱 끊었던 터였다. 거리가 너무 멀다는 핑계였다. 이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남새밭이 있으니 그런 핑계는 통하지 않을 거다. 어디 두고 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