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비를 뿌리는 '횡재'

2013. 5. 25. 21:48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빠듯한 하루가 지났다. 아침부터 '베려버린 못자리'를 땜빵할 제2의 못자리 작업, 그 2라운드인 포트모판 볍씨넣기 작업. 안 해도 될 일을 해야 하니 달가울 리 없는 작업... 

약속한 9시가 됐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나도 늦었다. 늦잠을 자다가 헐레벌떡 준비를 하고 있는데 찬민이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아무도 없네요?"
철도청에 다니는 '아마추어 농사꾼'이 젤 먼저 나온 거다. 씁쓸... 60개 남짓 되는 모판을 싣고 작업장인 교회로 달려간다. 파종기를 설치하고, 전원을 넣고, 모판을 쌓고, 상토를 투입하고... 옳거니 모판에 물을 뿌릴 분무기가 없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니 오산리에 있단다.
"운영 씨, 빨랑 갔다 오지?"
너도나도 힘이 빠진, 그래서 준비 안 된 작업인지라 두 시간이면 될 일이 세 시간 넘게 걸렸다. 힘도 더 빠지는 건 당연하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니 졸음이 쏟아진다. 한 숨 눈을 붙였나 싶었는데, 강아지가 요란하게 짖는다. 나가 보니, 교회 장로인 앞집 어르신. 차도쪽을 가리키는 손짓을 하며 뭐라 말씀하신다. 무슨 뜻인지 알지. 오늘 새벽 댓바람에 찾아오셨었다.
"잉~ 퇴비포대가 저리 쌓여 있는디... 안 봤으면 몰라도... 이따가 오후에 시간 되면 내 트랙터로 뿌려줌세"


이를 두고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하는 것일게다. 20Kg짜리 퇴비를 160포대 구입했다. 친환경 벼농사를 짓기 때문에 배정된 양인데, 공짜는 아니고 보조금이 포함돼 있어 싼 값에 제공된다. 하지만 받아도 골치인게... 그걸 논에 뿌릴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이 고장은 소를 많이 치니 당연히 소똥도 많이 나온다. '경축순환'이라 하여 소똥을 발효시켜 퇴비로 반드는 공장이 옆 동네에 있다. 질이 꽤 좋다는 평을 듣고 있는 퇴비다.

 

한 마지기에 세 포대씩, 도합 30포대를 뿌린 유박거름도 이틀이 걸렸는데, 물경 160포대, 그것도 마지기 당 15포대씩, 열 마지기를 뿌려야 한다. '퇴비살포기'를 트랙터에 연결해 쓰면 간단한 작업이다.문제는 내게는 지금, 트랙터가 없다는 사실! 그래서다. 유박을 등에 지는 살포기를 뿌리는 것보다 더욱 힘겨운 작업에 나서야 할 판이었다.

 

 

일단 트럭으로 퇴비포대를 논에 실어나르고, 외바퀴수레에 너댓 포씩 담아 적당한 위치에 분산배치하고, 커터칼로 주둥이를 갈라 두 손으로 잡아 퇴비를 쏟아낸다. 이것이 손작업으로 하는 퇴비 뿌리기 공정이다. 물론 끔찍하다. 열 마지기 뿌리는데 사나흘은 족히 걸릴 게다. 그런 형편에 청하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해주시겠다니... '감지덕지', '황공무지' 따위의 수사가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가 대수인가? 트럭 짐칸에 퇴비포대를 싣는다. 헉헉 대면서... 땀을 비오듯 흘리며 100포 남짓 실으니 짐칸이 다 찼다. 이제 논으로 출발~?
어르신은 트랙터를 몰아야 하니 트럭은 당연히 내가 몰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껏 '오토' 차량만 몰아본 나로선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으니 트럭 운전석에 오른다. 다행히 '1종보통' 면허를 땄고, 어슴프레 기억은 남아 있다. 여러 차례 시동을 꺼뜨렸지만 그럭저럭 무사히 도착했다.

 

이번엔 한 포대, 한 포대 주둥이를 커터칼로 갈라서 퇴비살포기에 부어 넣는다. 근육에 적잖이 무리가 간다. 한 번에 20포 남짓을 넣을 수 있다. 땀이 비오듯 기진맥진... 20분 걸려 채워넣은 퇴비를 한 10분이면 뿌린다. 다시 채워넣어줘야지...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에 젖산이 쌓여 시큰거린다.

2시쯤 시작된 작업은 6시쯤 끝났다. 사나흘 걸릴 일이 4시간도 안 돼 끝난 셈이다. 이거야말로 횡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