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시퍼렇게 살아남은 보리

2013. 5. 31. 23:06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 저녁노을 괸 하늘만 눈에 차누나.
 
가곡 '보리밭'이다. 여기 나온 보리밭이 이 즈음의 그것인진 모르겠으나, 논 한켠에서 익어가는 보리 모가지들이 가녀린 바람에 하늘거리다. 세차게 불어오기라도 할라치면, 저희끼리 몸을 부딪는 소리가 서걱서걱 들려올 듯 하다.

 

 

얼마 전에 갈아엎지 않았느냐고? 맞다. 하지만 그 때, 조금 남겨둔 놈들이 있었다. 한 50평 남짓이나 되려나. 학교 단오한마당 준비모임을 하면서 먹거리마당의 하나로 '풋보리 구워 먹기'를 바로 내가 제안했던 터다.


풋보리 구운 걸 어떤 고장에서는 '보리 그스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인데,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보리 민딩이'다. 아무튼 이 풋보리 구이는 '보리고개 먹거리'의 하나였다. 특히 아이들에겐. 뻘뻘 땀 흘리면 신나게 놀다가 속이 출출해진 아이들은 들녘에서 익어가는(아직 여물지 않은!) 보리 이삭을 한 움큼 뜯어다가 불을 피워 구웠다. 까락(흔히 '까시래기'라 부르는)이 타 없어질 때 쯤, 아직 뜨거운 보리 이삭을 꺼내 두 손으로 싹싹 비비대면 보리 알갱이가 잡힌다. 입으로 겉껍질을 후후 불어대면 나중엔 파릇파릇한 풋보리 낱알만 남게 되는데, 그걸 한 입에 탁 털어넣고 씹다보면... 고소하면서도 풋풋한 맛이 일품이었다. 너무 배고파서 일지도 모르겠고, 지금 다시 먹어보면 어떤 맛일지도 궁금하다만... 적잖이 기대가 된다.

사실, 보리를 '살려두면' 트랙터가 없는 나로서는 모내기를 위한 논갈이와 써래질에 적잖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굳이 풋보리 구워먹기를 제안한 것은 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보리에게 그렇게라도 '식량' 본래의 구실을 하게 함으로써 갈아엎는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 했던 건 아닌지...


못자리 물을 보고, 어뜻 생각나 들른 보리밭을 보며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