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7. 21:48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빗줄기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줄카장 쏟아지고 있다. 이 또한 단비가 틀림없는 게 텃밭의 푸성귀들이 몰라보게 싱싱해졌다. 엇갈이배추, 열무, 쑥갓, 아욱 따위 싹을 올린 지 얼마 안 되는 것들이 하룻밤 새 몰라보게 자랐다. 더불어 풀도 욱어지고 있다.
이번 비가 단비인 것은 무엇보다 두번째 못자리를 생각했을 때 그렇다. 지난번 못자리는 물을 제대로 대지 못해 베려버리고 말았다.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오늘 아침 못자리를 덮고 있던 부직포를 걷어냈다. 처음으로 못자리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상태가 말이 아니다. 그나마 너무 늦지 않게 싸나락을 다시 담가 싹을 틔워놓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지난 토요일 씨나락을 모판에 파종하고 이틀 만인 오늘, 못자리 판에 가지런히 얹는 것이다.
푸른 못자리 너머 흰 부직포가 덮힌 두 줄이 오늘 새로 만든 못자리
큰 실패를 겪은 터라 마음이 무겁고 긴장되기까지 했다. 그런 탓에 간밤엔 잠을 설쳤다. 더욱이 월요일엔 새벽 5시에 고추밭 작업이 있어 무거운 머리, 뻑뻑한 눈을 억지로 깨워 일으켰다. 어젯밤엔 옆 동네 지민이네 집들이가 있어 꽤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탓이다.
오늘 할 일은 노끈을 지주대에 엮어 고추모를 지탱해주는 '끈띠기'. 아울러 고추밭 두렁에 길게 자라난 큰 풀 베어내기. 여인네들이 끈을 띠는 사이 내게는 풀을 베는 임무가 주어졌다. 예전에야 낫으로 했지만 지금은 당연하게도(?) 예초기를 쓴다. 눈을 뜬 뒤 곧바로 예초기를 조립해 기름을 넣어 시험가동을 하고, 안전장구를 챙겨 고추밭에 다다랐다. 그런데 워낙 돌맹이가 많은 밭이라 자주 칼날에 부딪혀 불꽃이 튄다. 더러 깨져나온 돌가루가 정강이를 후려친다. 신경이 곤두선다. 처음엔 예초기 작업봉의 반동이 버거워 힘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많이 익숙해졌다.
작업을 시작한 지 30분이나 지났을까, 빗방울이 떨어진다. 예보(오전 9시)보다 세 시간이나 이른 시각이다. 빗줄기는 금새 굵어지고 세차게 내리친다. 다행히 작업도 일찌감치 끝이 났다. 몸은 고추밭에 있어도 신경은 온통 못자리에 가 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전화를 돌리니 오전 9시에 작업을 하자던 김 장로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오후로 미루잔다. 어쩔 도리가 없지. 그래도 준비작업은 해야 하니 못자리 논으로 나갔다. 다행히 빗줄기가 걱정했던 것보단 억세지 않다. 유박 거름 한 포대를 뿌린 뒤, '베려버린' 못자리의 부직포를 걷어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심각하다. 제대로 된 모판이 절반이나 되려나. 나머지는 '쥐가 파 먹은 듯' 움퍽진퍽 말이 아니다.
약속된 오후 2시. 못자리 작업이 시작됐다. 지난번 실패를 거울 삼아 신중하게 작업을 해나간다. 논바닥을 좀더 평평하게 고르고, 널판지를 가져다 반반하게 밀어준다.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리지 못하도록 모기장을 깔고 모판을 가지런히 얹는다. 물이 잘 공급되도록 높이를 최대한 낮춘다. 모두 다섯이 함께 작업했다. 그 사이에도 빗줄기는 끊이지 않고 내린다. 처음엔 비옷을 걸쳤는데 일을 하는데 거추장스러워 벗어던지니 얼마 되지 않아 속옷까지 모두 젖어버렸다. 그래도 날이 덮지 않아 작업속도는 더 빨랐다. 채 두 시간도 안 돼 작업이 모두 끝났다.
몸뚱이는 척척해도 다 해치웠다는 생각 때문인지 개운하다. 집으로 돌아와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속옷을 갈아입으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또 구비를 넘어가는구나. 다음 고개는 모내기. 잘 풀려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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