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4. 23:18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지금은 없었던 일이 되었지만, 얼마 전 집주인이 갑자기 집을 팔겠다고 내놨을 때 말이다. 새로 살 집을 보러다니면서 그 여자는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으로 '1~2백평의 텃밭'을 꼽았었다. 텃밭만 생기면 밭작물이란 밭작물은 죄다 지을 기세였다. 마늘도 심고, 고추도 심고, 또 뭣도 심고... 그러다가 두 어 달이 가도록 흥정이 없었던지 집주인은 하는 수 없이 전세계약을 2년 연장하자고 나왔고, 우리야 옳다커니 응했다.
그게 지난 5월초. 바야흐로 상추며, 쑥갓, 시금치, 엇갈이배추, 열무, 아욱... 푸성귀는 이미 심어져 있어야 할 때였다. 그런데 정작 텃밭조차 없었다. 지난해에는 동네 모정 옆 자리 1백평을 여덟집이 함께 빌려 텃밭을 일구었지만, 그 여자는 '너무 멀다'는 핑계로 두 번인가 걸음하고는 발길을 딱 끊었었다. 하여 우리집 바로 뒷밭 한쪽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밭주인인 옆집 아우에게 아쉬운 부탁을 했던 것이다. 뭐, 말로야 의당 그래야 하는 것마냥 그랬다.
"정수 씨! 애 엄마가 하도 텃밭 타령이라서... 밭 한 쪽만 떼줘"
사람 좋은 정수 씨가 거절할 리가 없다는 계산 속으로.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이미 솔찬케 '대가'를 치렀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다. 아무튼.
그렇게 애를 써서 밭을 구해줬으면, 텃밭 타령을 했던 분이 텃밭을 가꿔야 할 차례 아니던가. 그래, 밭을 만드는 일은 힘 센 놈이 한다고 치자. 채 20평도 안 되는 손바닥 만한 땅뙈기 갈자고 트랙터나 관리기를 끌어댈 것도 아니고, 삽하고 쇠스랑으로 땅 파고 골라 이랑을 지었다. 그럼, 텃밭 타령을 했던 분이 응당 씨를 뿌리든, 모종을 심든 해야지. 그런데 이 또한 감감 무소식. 하는 수 없이, 고추모종 열 그루와 겨울을 난 상추 스무 포기 남짓 떠다가 놓았다. 이래도 안 할 거냐는 일종의 '시위'였다.
그제서야 눈치가 보였는지, 그 주말 아침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던 거다. 모종을 옮겨심고, 씨도 뿌리고... 그 다음날에는 왠일로 장보고 오는 길에 피망과 파프리카, 수박, 방울토마토 모종을 사다 심는 게 아닌가. 거기까진 좋았다. 그리고 보름 남짓 흘렀다. 그 새 족히 두 번은 내려왔고, 분명 텃밭을 쳐다보긴 했을 텐데 상태가 바뀌질 않는다. 뭐가? 작물만 자라는 게 아니라 풀도 함께 자라는 법, 풀이 올라오면 매줘야 하는데 이 또한 감감 무소식이더라 이 말이지. 이젠 풀이 우거져서 비름나물은 아예 작물을 뒤덮고 있었다. 지난 주말을 넘기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 꼴을 보았다면 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지경.
Before <- 텃밭 풀매기 - > After
어머니 댁에 일이 있어 같이 가잤더니 할 일이 밀렸단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월요일, 그러니까 어제 새벽부터 바쁘게 채비를 하더니 직장(경기도 수원)에 출근한 모양이다. 고추밭 두 벌 매기를 하고 돌아와 텃밭을 둘러봤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풀은 우거진 채 그래로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번에도 풀매기는 내 차직 되고 말았다. 많이 절었고, 솔찬히 억셌다. 땀이 비질거리고, 작업시간도 한 두 시간이나 걸렸다. 쪼그리고 앉아 일했더니만 무릎이 시큰거린다. 내친 김에 고추모에 지주대 꽂아 끈을 띠고, 오이와 방울토마토에도 지주대를 세워줬다.
일하는 내내 부아가 치민다. 이게 뭐여. 밭 만들어줘, 씨 뿌려줘, 이젠 풀까지 매줘... 텃밭 타령 하던 인간은 당최 뭐 하자는 거여. 땀나는 일은 알 바 아니고, 시간 되면 뿅 나타나서 '수확의 기쁨'이나 누리겠다는 거 아니냐고. 정말 염치가 없어도 푼수가 있어야지. 수확의 기쁨이란 본시 땀흘려 가꾼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 아니던가. 채소와 열매를 거둬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노동이다. 뜯고, 캐고, 따는 수고는 오히려 '놀이'에 가깝다. 그러니 돈을 내고 수확해 가져가는 프로그램까지 나온 거 아니겠나. 그런 대가라도 치르지 않을 거면서, 낯두껍게 따 잡수시겠단 심뽀 아니냐 이거여, 시방. 그 여자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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