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10. 23:09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피사리가 이리 싱겁게 끝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제는 한 시간 남짓 집 가까운 논 열 댓 마지기 파시리를 했고, 어제와 오늘은 안밤실 열 마지기를 해치웠다. 어제는 땡볕이 잦아든 저녁 무렵 두 어시간, 오늘은 아침 일찍 시작해 10시쯤 끝났다. 피사리하는 데 들인 시간을 모두 더하면 예닐곱 시간, 채 하루도 걸리지 않은 셈이다.
지난해와 견주어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피사리가 이렇게 빨리 끝나도 되는 건가? 해서 일을 끝내고도 한 동안 멍하니 논바닥을 둘러 봤다. 스스로 겪고, 바로 눈 앞에 보고 있지만 믿기지가 않았던 것.
하늘이 무슨 조화를 부려 선물을 줄 만큼 평소 공덕을 쌓은 것도 아니고... 생각컨데 날씨 덕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지난해는 모내기 즈음에 '백 년만'이라는 가뭄이 왔다. 모내기 한 논이 바닥을 드러내 피가 자리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던 것이다. 피는 이른바 '습생잡초(濕生雜草)'로서 산소가 많이 필요하다. 따라서 물을 깊이 대면 산소가 막혀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싹을 틔우더라도 맥을 못 춘다. 올해는 거꾸로 모내기 즈음에 장마가 와 물을 철철 댈 수 있었다. 피가 제대로 자랄 수 없었던 것이다. 용케 자라난 피도 우렁이를 풀어 뜯어먹도록 했으니 버티기 힘들었을 게다. 그 때문에 아무리 둘러봐도 피 한 가닥 보기가 힘들었다. 모를 때우면서 이미 확인한 바다.
사진 중간에 보이는 덮수룩한 곳이 피 군락
피를 뽑아내니 벼 포기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하루 가까이 뽑았다는 피는 어인 놈들인가. 모내기에 앞서 논바닥을 '뻘밭'으로 만들어 판판하게 고르는 써래질을 하는데, 이 때 평을 잡지 못해 봉긋하게 솟는 곳이 몇 군데 나오게 마련이다. 이런 곳에는 물을 대도 마치 섬처럼 바닥을 드러낸다. 바로 여기서 피가 싹을 틔우고 무리지어 군락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곳은 우렁이도 다가가지 못한다. 손으로 뽑아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피사리다.
그런데 그런 군락마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큰 군락을 해치우는 데 한 시간 남짓, 작은 군락은 5~10분. 손으로 뽑아 한 움큼 씩 사려 논바닥 아래 파묻어 버리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논바닥을 샅샅이 둘러봤지만 그게 전부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리고 흥분이 된다. 지난해 한 달 넘게 걸린 피사리가 단 하룻만에 끝났으니 안 그렇겠나. 그 지긋지긋한 뙤약볕 아래 나서지 않아도 된다! 이 아니 설렐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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