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리 '원정'

2013. 7. 17. 18:27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피사리 '원정'

 

우리논 30마지기 피사리를 딱 7시간 만에 끝냈다는 건 이미 얘기했고.

요즘은 그 다음 일거리로 논두렁 풀을 베고 있다. 장마를 거친 뒤 끝이라 하루가 다르게 풀이 자라 우거져 있다. 논두렁 풀에는 여러 가지 벌레들이 깃들어 살아간다. 게 중에는 벼를 해치는 놈도 있지만, 거꾸로 도움이 되는 놈도 있다.

아무튼 병충해가 몰려오더라도 우리는 농약을 치지 않으니 뾰족한 수가 없다. 더러 목초액 같은 '천연농약'을 만들어 뿌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냥 (벌레들 하고) 나눠먹고 말지!' 속 편하게 생각한다. 그나마 모를 강하게 기르고, 드물게 심어 저항력을 높이려 애쓴다. 거기에다 이른바 '천적효과'라 해서, 해충을 제압하는 벌레를 살려두는 게 병충해 대책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되도록 논두렁의 풀을 내버려두려 한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게 그리 간단치가 않다.

 

동네 어르신들은 논두렁에 풀이 우거지는 꼴을 못 본다. 우선 보기에 껄쩍찌근 하다는 것이고, 거기에 해충이 우글거린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설령 '천적'이 깃들어 산다고 해도 대수롭지가 않다. 병충해가 크게 번지더라도 살충제나 살균제를 뿌리면 그만이니까. 해서 논두렁 풀이 우거지기가 무섭게 예초기로 베어낸다. 심지어 논두렁에 제초제를 뿌리기도 한다. 우리처럼 논두렁을 내버려두는 사람들은 지청구를 들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전 이장님한테 그예 한 소리를 들었다.

 

"모도 다 때우고, 피사리는 헐 것도 벨로 읎은 게, 인자 논두렁 풀 좀 비어내!"
"그게... 천적 때문에 일부로 놔두는 건데요..."

"누가 그런 소릴 혀! 암것도 모르고, 원리원칙만 아는 놈들이 그런 소릴 허는 겨!"

하도 단호하게 얘기하니 그 다음 댓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다음에 마주쳤을 때도 같은 얘기라... 더구나 이장님과는 논두렁을 사이에 두고 있는 논이 두 배미나 되는 터라, 그 압박감이 남다를 수밖에. 에라 모르겠다.

 

그 다음날부터 '논두렁 치기'를 시작했다. 다만, 남들처럼 박박 깎아 민둥머리를 만들는 대신 벼포기와 논두렁의 경계선 부분만 살짝 베어내 풀을 최대한 살려두는 방식을 썼다. 그런데 예초기 작업이 쉽지가 않다. 강철 칼날이 빠르게 돌아가는 위험천만한 작업이어서 바짝 긴장을 하는데다, 작업대에 전해지는 엔진의 진동도 만만치가 않다. 지금까지 해본 바로는 한 번에 두 시간 넘게 작업하기가 힘들다. 자연히 논두렁 치기 작업도 어느덧 일주일 째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오늘부터는 안밤실에 있는 논두렁 차례. 차를 몰고 가노라니 드는 생각.

'흠... 안밤실 광수 씨. 요즘 며 칠 째 피사리를 하고 있다지? 바로 옆인데,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광수 씨네 논 상태.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은 논바닥 왼쪽 이 마치 잔디구장처럼 새파란데, 요놈들이 바로 싹튼 지 얼마 안 된 피다.

 

지난번 첫번째 모내기를 광수 씨와 함께 했다. 그 때 광수 씨네 논바닥을 보고 기절할 뻔 했다. 모내기를 앞둔 논바닥에 피가 빽빽하게 올라와 있었던 것. 거기에다 모를 심으면 어찌될 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자연농법'을 실천하는 광수 씨는 태평했다. 올해는 우렁이를 듬뿍 넣어서 잡고, 그래도 안 되면 손으로 매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광수 씨를 볼 때마다 논의 안부를 물어왔는데, 얼마전부터 아침 일찍 피사리를 계속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 틈이 나면 도와주마 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핸드폰에 절로 손이 갔다.

 

"일어났어? 오늘도 피사리 할거지? 도와주러 동네 앞에 와 있는데..."

"안 그려도 지금 나가려던 참이여. 저수지 아랫 논 있지, 거기서 지둘려"

 

전체 다섯 배미 가운데, 네 배미는 그러저럭 피가 잡힌 상태였다. 우렁이를 권장량의 두 배 넘게 넣었고, 그래도 살아남은 놈은 손으로 맸다고 한다. 나머지 한 배미는 일부러 우렁이를 넣지 않았더니 아예 '피바다'가 되었고, 지금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정말 벼포기보다 피가 몇 배는 더 많아 보였다. 지난해의 악몽이 떠오른다. 아무튼 논에 들어서 피를 뽑아나가기 시작했다. 피가 제법 자라서 저항감이 만만찮다.

 

 

피로 빽빽히 들어차, 가히 '피바다'를 이룬 광수 씨네 논. 광수 씨 왼쪽으로 보이는 기계가 제초용으로 개초한 예초기.

 그런데 함께 피사리를 하던 광수 씨가 갑자기 예초기를 매고 들어선다. 가만 보니 그 모양이 많이 다르다. 예초기 칼날 부분을 제초기로 개조한 것이다. 시중에 널리 나와 있는 제품은 아니고, 경상도 어디에선가 아름아름 파는 모양이다. 제초장치를 벼포기 얹고 쓱쓱 밀어나가니 뻣뻣이 서 있던 피가 허리가 꺾어거나 잘린 째 물 위에 널부러진다. 뿌리까지 없애지는 못하므로 다시 올라오지만, 그 때는 싹이 연해서 우렁이가 먹어치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 화석연료의 힘이란... 손으로 하는 피사리에 견줘 몇 배는 빨라 보인다. 그 꼴을 보니 갑자기 피사리 하고픈 생각이 싹 가신다. 시작한 지 두 어 시간도 안 돼 작업을 끝냈다. 의욕이 꺾인데다 마침 아침 밥 때가 되어서다.

 

광수 씨는 '아침 진지 드시라고 해라!'는 심부름을 온 아이와 함께 집으로, 나는 풀이 우거진 논두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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