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고추

2013. 8. 5. 23:14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첫물 고추를 딴 지 일주일 만에 고추를 두벌 땄다.

 

점심이 지날 즈음,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굵은 소나기가 한 시간 넘게 쏟아지는 바람에 일을 할 수 있으려나 했다. 다행히 작업 예정시간이 4시가 가까워오자 비가 멈췄다. 

 

"우리, 지금 고추밭으로 출발했어요!"

비가 그치기 전부터 전화를 걸어 조바심 치던 주란 씨가 선전포고 하듯 작업개시를 알려왔다. 보나마나 이제부턴 날씨가 푹푹 찌고, 고추대는 빗물을 듬뿍 머금어 작업이 쉽지가 않을 텐데... 툴툴거리면서도 나설 차비를 한다. 고추밭에 도착하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워낙 억수같이 퍼부은 탓인지 고랑에는 아직 빗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 요행히 장화를 신고 와서 곧바로 작업할 수 있었다.  

 

 

  

 

빽빽히 자란 고추대를 나일론 끈으로 단단히 붙들어맨 데다가 고추는 고추대로 주렁주렁 열려 빨갛게 잘 익은 놈만 골라 따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꼭지가 달린 채로 따려다가 애매한 풋고추가 함께 달려오기도 한다. 이미 낮은 터널을 이룬 고랑을 허리를 굽히거나 오리걸음으로 지나가자니 고추대에 묻은 물은 고스란히 옷을 적신다. 따낸 고추를 비닐포대에 담으며 한 걸음 두 걸음 터널속을 지난다. 금새 척척해진 옷, 땀인지 빗물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고추따기가 끝났다. 비닐포대에 담아온 고추는 쌀이나 벼를 담는 마대자루로 옮겨 붓는다. '남부여대'... 사내는 짊어지고, 아낙은 머리에 이고 저만치 받혀둔 트럭으로 옮겨 싣는다. 모두 여덟 자루. 150Kg 쯤 되어 보인다. 수확량이 지난 첫물 때보다 50% 늘었다는 얘기.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치리. 근처 빈터에 막걸리 판을 벌였다. 취하자고 마시는 술이 아니니 한 사람에게 두 잔 남짓 돌아간다. 막걸리 안주로, 오늘 딴 빨간 생고추를 쓱쓱 씻어 한 입 베어문다. 화들짝 놀란 사람도 있겠지만, 이 맘 때 고추는 매운 맛은 거의 없고, 달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 역시 그랬다. 막걸리판은 두 순배로 끝났다. 그 다음은? 생고추를 팔 건 아니니 그 다음 차례는 고추를 말려야 한다. 어떻게?

 

일단 김 장로네 집으로 트럭을 몰고 간다. 그 곳에 건조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럼, 초가 아니었단 말이여?" 하고 말이다. 하긴 사람들이 괜히 태양초 타령을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태양초와 기계건조는 색과 향, 맛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몸소 견주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실제로 그런지, 다르면 얼마나 다른지 알 길이 없다. 문제는 요즘 같은 날씨엔 태양초를 만들기가 무척 힘들다는 사실. 하루에도 몇 차례 씩 소나기가 내려 '태양'을 가리는 판에 어떻게 햇빛을 충분히 쐴 수 있느냐는 거다. 햇볕이 좋아도 고추를 완전히 말리는데는 6~7일이 걸린다고 한다. 요즘 고추는 육질이 무척 두꺼워서 말리는 시간도 그만큼 오래 걸린다는 것. 어떤 고장에서는 '교반기'라고 해서 자동으로 고추를 뒤집어주는 기계를 발명해서 그 기간을 반으로 줄였다는 뉴스도 있긴 하다. 태양초라고 해도 그냥 '맨땅'이 아니라 대부분 비닐하우스에서 말리니 그런 기계가 요긴할 만 하겠다.

 

 

 

그런데 고추를 말리는 도중 날씨가 흐려고, 습도가 높아지면 '희나리진다' 해서 더러는 색깔이 하예지거나 바래서 못쓰게 된다. 그러니 장말철에는 태양초가 쉽지가 않다는 얘기다. 때문에 '반태양초'라고, 건조기로 하루 쯤 쪄낸 뒤 햇볕에 말리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완전태양초보다는 몇 일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지만, 이 때도 열쇠는 날씨가 되겠다. 그런데 여기, 농약과 화학비료로 길러 햇볕에 말린 태양초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았지만 기계로 말린 고추가 있다고 치자. 당신이라면 어느 걸 고르겠는가. 물론, '유기농(자연농) 태양초'가 현답이다. 

 

아무튼 우리는 여러 사정을 감안해 처음부터 기계건초를 택했다. 내가 건조기를 자세히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김 장로네 건조기는 석유를 연료로 쓴다. 전기를 쓰는 건조기도 있다. 비용으로 보나 생태에 미치는 영향으로 보나 전기식을 더 쳐주는 것 같다. 최근에는 태양열을 이용한 건조기도 시제품이 만들어진 모양인데 성능은 견주기가 어렵다고 한다.

 

트럭에 싣고온 고추자루를 내려 철제그릇에 나눠 담은 뒤 건조기 시렁(트레이)에 차곡차곡 쌓았다. 쌓기 작업이 끝나고 점화 스위치를 넣으니 건조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건조작업이 끝나는 사흘 뒤 고추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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