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21. 00:11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생각해보니 좀 격조했다. 벼농사가 주업인 농사꾼이 한 달 만에 나락 얘기를 꺼내게 됐으니 하는 말이다. 이게 다 '피사리 효과'다. 올해는 피가 올라오지 않는 바람에 지난해와 견줘 피사리에 들일 품을 벌었고, 그게 대략 한 달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달포 남짓은 논에 발길을 끊었느냐면 그건 아니다. 지난해처럼 매일 '출근'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사나흘에 한 번은 둘러봤다. 아무리 그래도 물은 제대로 공급되는지, 논둑은 괜찮은지 정도는 살펴봐야 하는 까닭이다. 다행히도 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지난 한 달은 열대기후를 떠올리는 불볕더위가 이어지면서 낮시간에는 논에 나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열대야가 이어지면서 아침부터 섭씨 30도를 넘어서니 어쩔 도리가 있나.
그나마 논에 나가볼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게 엊그제부터다. 열대야가 그쳤고, 아침 기온도 선선한 느낌을 줄 만큼 떨어졌던 것이다. 하여 오늘 아침은 작심을 하고 길을 나섰다. 짙푸른 볏잎마다 매달린 '영롱한' 이슬이 아침햇밭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눈이 부시다. 그리고 또 다른 낯선 풍경이 있었으니... 목을 내밀었다. 벼이삭이 팬 것이다.
그것은 개화(開花), 꽃이 핀 것이다. '꽃'이라 했을 때는 온갖 화사한 모양새가 떠오르겠지만 외떡잎 식물의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아니, "벼도 꽃이 피느냐?"고 되물을 사람이 더 많을 성 싶다. 하지만 꽃 없이 맺히는 열매가 어디 있으랴. 그저 '꽃 같지 않은 꽃'이 필 뿐이다. 벼꽃이 그렇다. 보기도 쉽지 않고, '자가수정'을 한다고 한다. 아무튼 이삭이 패었으니 이젠 튼실한 쌀로 여물기를...
그새 논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모내기 두 달 만에 벼포기는 새끼를 치고 훌쩍 자랐다. 나아가 허리높이, 어깨높이 수풀로 우거지면서 숱한 생명을 아우르고 있다. 매뚜기, 섬서구매뚜기, 거미, 그리고 이름 모를 목숨붙이들... 게 중에는 벼잎을 갉아먹는 벌레, 그런 병충(病蟲)을 잡는 벌레... 더불어 산다. 무엇이 해충이고, 무엇이 익충인가. 그저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 생태계일 뿐이다.
그리고... 쌀은 거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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