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5. 18:00ㆍ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올해도 ‘싸전’을 열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짼데 ‘장사’라는 일, 여전히 뻘줌하다. 이따금 ‘장사꾼’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제 꼴을 발견한다. 농사를 시작할 때부터, 짓는 게 다가 아니고 판로 또한 스스로 열어가야 함을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다. 물론 농협수매를 통해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다.
마침 오늘은 우리 마을이 벼를 수매하는 날이다. 그러나 나는 이 공판장에 나락을 단 포대도 내지 않았다. 물론 조합원으로 가입하긴 했지만 여전히 농협은 나와 거리가 멀고, 유통체계 또한 시중과 그닥 다를 게 없는 탓이다. 요컨대 ‘유통마진’을 붙이는 만큼 농민에게 싸게 사서 소비자에게 비싸게 팔기는 농협 또한 마찬가지란 얘기다. 실제로 특등부터 3등까지 매겨진 수매가는 산지 쌀값과 엇비슷하다.
그런데도 대다수 농민에게는 다른 수가 거의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수매에 나서거나, ‘수매가 인상’을 내걸고 투쟁을 벌이거나 한다. 나 또한 중뿔날 것 없는 처지지만 우연찮게 ‘도농직거래’의 가능성을 확인한 경우다. 지난해 수확한 쌀을 지인들에게 한 줌씩 나눠준 뒤 추가주문이 들어왔고, 결국 삽시간에 동이 났다. 10Kg, 20Kg씩 해서 언제 다 팔아치우나 싶었는데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올해는 농사면적을 두 배 넘게 늘렸고, 팔아야 할 쌀은 여섯 배나 된다. 셈이 이리 된 것은 지난해는 함께 농사지은 운영 씨와 소출을 절반씩 나눈 데다, ‘첫수확’이랍시고 여기저기 퍼준 양이 꽤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섯 배나 되는 양도 지금 같은 추세라면 그럭저럭 팔려나갈 듯하다. ‘유기농 쌀인데다 밥맛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검증 안 된 농사꾼’이라 해서 남들이 마다하는 물빠짐이 안 좋은 논, 수렁논은 죄다 나한테 떨어졌는데, 그런 찰진 논에서 나는 ‘고라실 수렁쌀’은 특히 밥맛이 좋다고 한다.
한편 직거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문에 풍흉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중 쌀값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나 싶어 지난해와 똑같이 값을 매겼다. 앞으로도 이변이 없는 한 이 수준을 유지할 생각이다.
또 하나 도움이 된 것은 장기투쟁지원단 <뚝딱이>. 뚝딱이는 지난해 지원물품을 ‘유기농 잡곡세트(현미, 흑미, 찰보리, 서리태, 기장, 찰수수)’로 바꿨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올해는 그 양을 크게 늘렸고, 의미를 더하고자 나를 비롯해 민주노총 출신 귀농인 세 명(이정영 민주노총 전 조직국장, 김재호 서비스연맹 전 교선부장)이 손수 지은 잡곡으로 내용물을 채우기로 한 바 있다. 일종의 ‘계약재배’였던 셈. 이에 따라 올해 지은 쌀 가운데 20% 남짓을 이 사업을 통해 처분하게 됐다. 여러 모로 뜻 깊고,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거둬들인 쌀이 크게 늘었어도 그 대부분을 이렇듯 ‘내가 사랑하고, 연대하고픈 이들’, 그들의 벗들과 나눌 수 있어 참 뿌듯하다. 이윤이 전부인 그저 그런 싸전이 아니라 생태와 연대의 가치가 숨 쉬는 싸전이니 나는 오늘도 기꺼운 마음으로 저울에 쌀을 달아 쌀자루에 담고, 택배상자를 포장한다. <함께하는 품> 9-2호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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