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5. 17:38ㆍ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황금물결이 일렁이던 들녘은 이제 칙칙한 흑갈색으로 되돌아갔다. 휑한 바람이 불고 공기가 차가워졌다. 며칠 전 대입수능시험을 치렀고, 엊그제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으니 그럴 때도 되었지 싶다. 늦가을이요, 겨울의 문턱이다.
올해 가을걷이는 모두 끝났다. 그런데 이번엔 벼 수확에 큰 애를 먹었다. 오늘에야 마지막으로 햇볕에 널어 말린 나락을 거둬들였다. 남들보다 열흘 이상 늦었다. 가을비가 유난히 잦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태 일머리를 깨치지 못한 ‘반풍수’의 비애라 해야겠다. 지난해 이맘때의 “가을걷이 참 싱겁더라!”는 얘기는 결국 ‘입방정’이 되고 말았다. 싱겁기는커녕 물찬 논에서 낫으로 벼를 베는 생고생을 했으니 말이다.
막판에 사달이 났다. 나머지 논은 다 거둬들이고 ‘죽산배미’ 네 마지기만 남긴 상태였다. 콤바인 작업 전날 ‘갓 돌리기’(기계작업이 편하도록 논 귀퉁이를 낫으로 베어놓은 일)를 하러 갔다가 ‘멘붕’을 맞았다. 적당히 말라 있으리라 믿고 있던 논바닥 절반에 물이 흥건한 게 아닌가. 그 동안 바깥쪽이 잘 말라 있어 안쪽도 그러려니 넘어 간 게 탈이었다. 언덕 쪽에서 계속 물이 흘러든 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지난 몇 년 묵혀뒀다가 올해 처음 지은 논이라 그 뽄새를 잘 알 수 없던 탓도 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 상태로는 아예 콤바인 작업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논바닥을 말리자면 이 겨울이 다 지난다.
남은 길은 두 가지. 수확을 포기하거나 ‘가시밭길’을 가거나. 하지만 수확을 포기하기엔 작황이 너무 좋다. 이삭도 묵직하고 나락 때깔도 곱다. 무엇보다 한 해 동안 쏟은 땀방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갈 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콤바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을 낫으로 베어내는 것-이게 바로 ‘벼베기’다-이다.
그게 무에 어렵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뜩이나 일손이 모자란 요즘 농촌에, 그것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 논 벼베기에 품을 팔 사람은 없다. 혼자서? 그러다가 추수철 다 끝난다. 오직 ‘고난을 함께 할 동지’만이 구원해줄 수 있다. 염치 불구하고 영록 씨한테 하소연했더니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와서 두 어 시간 도와주고 갔다. 그래봤자 턱도 없다. 같은 생태작목반 주란 씨한테 사정을 얘기했더니 다음날 점심때가 막 지나 전화가 왔다.
“지금 그 쪽으로 갈려고 하는데, 논 위치가 어디래요?”
주란 씨만이 아니라 조금 뒤에는 정화 씨와 영자 씨가 잇따라 도착했다. 반가운 마음보다는 여인들에게 그 험한 논일이라니, 미안함이 앞선다. 그래도 여럿이서 낫질을 하고, 볏단을 묶어 세우니 아득하기만 하던 작업이 한나절 만에 끝이 났다. 이건 ‘기적’이다.
이제 콤바인만 ‘모셔오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지금껏 우리 논을 맡아온 이의 콤바인은 큰 고장이 나 정비공장에 들어가 있다 하고, 다른 이들 기계도 이런저런 이유로 작업이 어렵다고 했다. 해서 이웃마을까지 달려가 통사정을 해봤지만 대답은 단호했다. 이미 기계를 청소해서 창고에 들여놔 다시 꺼낼 수가 없다는 얘기다. 내 생각에도 고작 네 마지기 작업비 바라고 무리를 하긴 힘들겠지.
그러니 이번에도 ‘동지’의 ‘헌신적 연대’에 기댈 수밖에 없다. 친환경 벼작목반 장 회장한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 분으로 말할 거 같으면, 그냥 옆 동네도 아니고, 논에서 이십 리 길 떨어진 ‘강 건거’ 마을에 살고 있다. 전화로 어렵게 얘기를 꺼냈는데 뜻밖에 “알았다”고 한다. 이런저런 군소리도 없다. 오후에 시간이 나는 대로 해주겠다는 것이다. 마른 논은 콤바인을 몰아 수확했고, 낫으로 베어 묶어 둔 볏단은 하나하나 날라다 털었다. 그게 지난 주말, 시답잖은 ‘입방정’ 때문에 제대로 혼쭐이 난 셈이다. 앞으론 입조심 단단히 해야겠다. <함께하는 품> 9-1호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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