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래불사정(正來不似正)

2014. 1. 14. 23:14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말띠, 그것도 청마의 해어쩌고저쩌고 하는 얘기는 이제 잦아들었다. 그래도 120년 전 동학농민군의 결기를 떠올리는 갑오년 갑오세는 아직 여운이 이어지고 있다. 보름 남짓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은 새해언저리에 걸쳐 있다는 말씀. 하여 지금쯤은 다가올 한 해를 내다보면서 새해 구상도 꺼내놓고 해야 할 텐데 좀 난감하다.

 

딱 하루 쉬고 새해를 시작하는 곳은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기사 표제를 봤다. 뻔한 내용일 테니 굳이 본문까지 보지는 않았고. 그런 현실이 좀 팍팍하긴 하겠지만 세월은 이미 마디가 져서 다음 토막으로 넘어갔다. 새 달력, 일지, 수첩이 나왔고, 공공이든 민간이든 기관과 기업, 단체의 회계연도가 바뀌었다. 모두들 새로 일을 시작한답시고 시무식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꾼은 전혀 아니다. 일을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다. 한참 겨울잠에 빠져 있다. 게을러서도, 농사를 지으면 느긋해져서도 아니다. 아직 때가 여물지 않은 것이다. 3월이 되어야 새 학기가 시작되는 학생들을 떠올리면 쉬 이해가 갈 것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전에 정래불사정(正來不似正)인 셈이다. 그렇다면 농사꾼한테는 언제쯤이 새해가 되는가.

 

당연히 음력설이다. 그나마 이 날은 마음만의 새해, ‘농사 시무식은 그 열닷새 뒤인 대보름이라 해야겠다. 지신밟기, 쥐불놀이 같은 풍속이 그렇고, 실제로 대보름이 지나면 농사준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한테 잘 들어맞는 자연스런 해맞이인 셈이다. 이에 따르자면 농사꾼에게 새해는 아직도 달포 가까이 남아 있다. 실제로 아직은 뭘 해보려도 딱히 할 게 없다. 나만 하더라도 올해 농사지을 땅이 아직 획정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전통 농경사회의 여운은 이즈음에서 끝인 것 같다. 대보름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주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산업사회아니던가. 농사철은 훨씬 빨리 닥친다. 설이 되기도 전에 농사는 시작될 것이다.

 

당장 오늘 아침나절 농사교육을 받고 왔다. ‘2014 새해 농업인 실용교육이라고, ‘고품질 쌀 생산기술에 대해 강의했다. 강사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지지난해, 지난해와 다를 게 없다. 게다가 벼농사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도 뭔가 있겠지 싶고, 이렇게라도 농사감각을 유지해야 할 것 같아 꼬박꼬박 참석한다.

그런데 잠든 땅을 맨 먼저 깨우는 놈은 고추다. 이미 지나치게세워진 비닐하우스 덕분에 파종시기가 훨씬 앞당겨진 탓이다. 올해도 생태농사모임 <온새미로>와 함께 고추농사를 짓게 된다. 맨 먼저 이달 하순에 씨앗을 뿌리게 된다. 고추육묘에 대해서는 지난해 이맘때 자세히 다룬 바 있는데, 올해는 칠성초라는 토종고추를 심기로 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안 쓰는 유기재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사람 몸에 더 좋은 건 두 말할 나위도 없고, ‘토종 유전자원을 지키고 잘 간수한다는 뜻도 있다.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웬만한 우리나라 종묘회사는 몬산토 같은 초국적기업에 넘어가 버렸다. 그 결과 토종 유전자원마저 비싼 값에 사 쓰는가 하면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의 위협 앞에 속절없이 드러나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토종씨앗을 보존, 보급하고 널리 가꾸는 일은 무척 뜻이 깊다 하겠다.

 

 

그런데 세상 참 좁다. 우리한테 칠성초 씨앗을 건네주기로 한 이가 알고 보니 아는 사람이다. 10년도 더 전에 홀연히 귀농하면서 내게 충격을 안겨줬던 중공업 활동가 이 아무개가 바로 그다. 처음엔 전북 변산에서 농사짓다가 지금은 전남 곡성으로 둥지를 옮겼다. 그리 넓은 땅은 아니지만 칠성초를 비롯해 생태농사를 지으면서 적정기술 관련 협동조합을 꾸리는 등 아주 멋있게(!) 살고 있다. 지난여름, 내가 사는 고산면 창업보육센터에서 고효율 화목난로 시제품을 만들고 있는 그를 처음 만났다. 얼마 전 완주군에서 열린 전환기술전람회 <나는 난로다>에서도 뜻밖에 마주쳤다. 우리 <온새미로>는 행사장 먹거리장터에서 부업으로 유기농 파전을 팔았는데, 그가 꾸린 협동조합은 우리 바로 옆자리에서 호떡 장사를 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안면을 튼 주란 씨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칠성초를 건네주기로 한 모양이다. <온새미로> 회원들과 함께 이번 주말 곡성을 다녀오기로 했다. 때마침 그 곳에서 토종씨앗 전람회도 열린단다. 곡성 땅은 초행길이다. 게다가 오랜 벗이 그곳에서 어찌 사는지도 궁금하던 터라 좀 마음이 설렌다.<함께하는 품> 10-1호 (201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