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6. 13:23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사방이 울긋불긋 꽃으로 뒤덮였다. 눈부시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자연의 이 신비로운 조화 앞에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다. 하여 어떤 시인은 그 정경을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 읊조렸다. 눈부시되 그저 휘황하지만은 않고 슬픔이 밴 아름다움. 그래서 봄은 한편으로 애달픈 계절이다. 또 누군가는 4월을 일러 ‘잔인한 달’이라 하지 않았던가.
찬란함이 오직 봄한테만 어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찬바람에 할퀴어 겨우내 메말랐던 가지에 때깔 고운 꽃 무더기가 피어오르기 때문일 게다.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새순과 잎이 돋아난 다음 피어나는 여름 꽃에 견줘보라. 봄이 눈부신 것은 메마른 나무와 고운 때깔의 대비효과라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메마른 나무’ 얘기를 좀 해야겠다. 그 나무는 다름 아닌 우리네 농촌이다. 꽃 같은 아이도, 풋풋한 청춘도, 농익은 중년도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백발성성한 어르신들만 남은 시골동네 말이다. 내가 사는 어우리만 해도 얼마 전까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학교통합으로 폐교 위기를 넘긴 마을 앞 초등학교 덕분에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학교 교사들의 바른 교육철학과 헌신이 알려지면서 귀촌인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사이 마을주민이 크게 늘어 지금은 120가구를 헤아린다. 시골치고는 무척 큰 동네다.(<완두콩> 2014년 2월호-이장님, 우리 이장님)
문제는 새로 들어온 이주민과 선주민이 한데 어울리지 못해왔던 것. 나처럼 농사짓는 서너 집을 빼고는 다들 전주나 익산, 봉동, 심지어 멀리 수도권에 직장을 두고 있는 이유가 컸지 싶다. 그러니 선주민들은 농사와 오랜 인연을 끈으로, 이주민들은 주로 ‘학부모’로서 끼리끼리 어울려왔다. 물론 일부러 담을 쌓은 건 아니고, 전업주부들처럼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 경우는 함께 어울리려 애써왔다. 하지만 ‘세대차’나 문화적 차이까지 넘어서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여 눈에 띄는 갈등이 있지도 않았지만 데면데면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난 토요일 저녁, 이주해 살고 있는 남정네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 학부모회 마을대표를 맡은 창수 씨가 스무 명한테 사발통문을 돌렸는데, 그 시각에 근무 중인 둘을 빼고는 모두 나왔다. 다양한 직종에, 들어온 지 5년이 훌쩍 넘은 이부터 채 1년도 안 된 이까지 두루 모였지만 마을 토박이는 하나도 없다.
창수 씨가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설명했다. 요컨대 이미 한 마을 주민이 되었고, 대부분 이곳에 정착할 뜻을 지닌 만큼 어르신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재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실은 저번 대보름날, 마을 논에서 몇몇이 쥐불놀이를 하다가 뜻을 모았던 얘기다.
방법과 절차에서는 더러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큰 뜻에는 모두가 공감했다. 내친 김에 창수 씨를 회장으로, 성용 씨를 총무로 뽑아 거론했던 일을 추진하고 마을사업에도 적극 나서기로 했다. 알고 보니 나를 빼고는 모두가 40대, 명실상부한 ‘마을청년회’가 발족한 셈이다. 늦게 참석한 60줄의 이장님도 모임을 크게 반겼고, 그 자리에서 ‘형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10~20년이 지나면 마을의 중추를 이룰 사람들이다. 도시로 떠난 이 마을 자손들? 보아하니 돌아와 살 사람은 그닥 많지 않을 듯싶다. 그러면 농민이 주축이던 농촌공동체는 이제 다양한 직업군이 더불어 사는 시골공동체로 바뀔 것이다. 이건 세대교체 정도가 아니라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 격변이라 할 만하다. 그 때 가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 또한 몹시 궁금하다. 부디 ‘마른 나무에 새순이 돋고 꽃이 피는’ 눈부신 조화가 일어나기를. <완두콩 201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