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7. 15:01ㆍ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힘든 한 해였다.
무엇보다 날씨 때문에 애를 먹었다. 모내기철 지독한 가뭄으로 온갖 잡초가 우거지는 통에 끔찍한 김매기에 시달렸더랬다. 그러더니 이번엔 ‘장마’라 해야 어울릴 법한 가을비가 두 차례 지나갔다. 나락을 거둬들여야 하는데 자꾸만 늦춰지니 속이 탔다. 마지막 수확이 예정됐던 날엔 갑자기 콤바인이 고장 나 작업을 시작도 못했는데 그 이튿날부터 내리 사흘 비가 내렸다. 그 놈의 날씨, 끝까지 속을 썩이는구나.
그러나 이젠 다 지난 일, 가을걷이는 모두 끝났다. 올해로 세 번 째, ‘싸전’을 열어 결실을 나누고 있다. 시절은 다시 ‘농한기’로 접어들었다.
농사는 끝없는 ‘순환운동’이다. 싹을 틔워 모내고, 김매고, 거름 주고, 거둬들이는 일이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제자리를 맴도는 건 아니다. 여건에 따라, 날씨에 따라, 무엇보다 농사꾼에 따라 반경이나 방향이 달라지는 나선형 운동이다. 그 운동이 지금껏 세 바퀴를 돈 셈이다.
그 자세한 궤적은 이 꼭지에 담겨 있다. 이번호로 15번째, 시간으로는 2년 반이다. 내가 농사지어온 세월과 같다. 무작정 시골로 내려오는 바람에 첫 한 해를 ‘적응기’로 보냈고, 이듬해 4월 벼농사를 시작한 직후부터 이 ‘일지’를 쓰기 시작했으니 그럴 밖에.
돌아보면 아득하기도 하고, 쏜살같이 흐른 것 같기도 하다. 그 사이 무슨 배짱이었는지 “나는 더 이상 새내기가 아니다!”고 제풀에 ‘선수교체’를 요청하기도 했고, ‘민주노총 전북 동창회’를 빙자해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번에서야 ‘꿈’이 이루어졌다. <품>을 통해 새내기 단계에서 벗어났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 3년 동안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어떻게 살아갈지’부터 시작해 어느 것 하나 막막하지 않은 게 없었는데, 지금은 몹시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벼농사 면적도 처음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밀려드는 쌀 수요를 충족하지 못해 거푸 50%씩 늘린 결과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부족인 듯하다. 이러다 ‘쌀농사 지어 재벌 되는’ 신화를 쓰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경작지가 늘어나니 농기계도 하나 둘 늘어날 밖에. 급기야 올 여름에는 트럭까지 샀다. 한 동네 운영 씨가 몰던 것을 넘겨받은 것이다. ‘석유농업’에 가세하는 찜찜함이 없지 않았지만, ‘내 것’이 아니라도 어차피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농기계다. 나부터도 트럭이 생기고 나서 이래저래 ‘선심’ 쓸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일전에는 옆 동네 근수 형님네 나락 포대를 방앗간까지 실어다줬다. 마을 지원사업을 하면서 귀농 연습 삼아 세 마지기 벼농사를 짓고 있는 분이다. 세 마지기라도 소출이 제법 돼서 화물차 한 대가 필요한데, 허물없고 만만한 내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시골 일이란 게 그렇다. 그냥 운송만 해주는 게 아니라 나락 포대를 싣고 내리고, 방앗간에 쏟아 붓고, 현미와 백미를 자루에 담고... 하는 일을 죄다 거들 수밖에 없다. 그 보답으로 나중에 술 한 잔 사면 그만이고. 뭐든 나누지 않으면 쉽지 않은 게 시골이다.
농사꾼으로서 지난 3년은 이렇듯 많은 게 늘어나는 시간이었다. 반면 ‘마이너스’도 없을 수 없다. ‘세월의 벽’이 그 하나다. 지난 이 태 동안은 거둬들인 나락을 도로 위에 펴서 말렸는데 올해부터는 전기건조장에 맡겼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40Kg 짜리 나락 포대를 들어 옮기기가 힘에 부친 까닭이다. 계속 하다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 근력으로는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이젠 맨몸으로 버티기엔 농사규모도 많이 늘었으니 어쩔 수가 없기도 하다. 아무튼 생태에 미치는 악영향도 그렇고, ‘늙었나보다’는 쓸쓸함도 그렇고 아쉬움이 크다.
세상 살아가는 데 ‘플러스’만 있을 순 없다. 행여 있다손 치더라도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닐 게다. 갈등, 시련, 곤경, 절망 같은 위기를 딛고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행복감은 극대화된다고 하지 않던가. 시골살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 와서부터는 ‘행복’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입에 올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시에 살 때는 참 낯설고 손발 오그라드는 단어였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얘기했던 ‘시골살이 인문학’ 수업은 예정대로 넉 달 과정이 마무리됐다. 수강생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생각했던 대로 나한테는 참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그 때 얘기했듯 스스로 목말랐던 내용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그들과 주고받는 과정에서 깨달은 바도 적지 않다. 앞으로도 내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점에서 그것은 차라리 ‘횡재’라 할 만하다.
그 점은 이 ‘새내기 농사꾼일지’도 마찬가지다. 고백하건대 두 달에 한 번이지만 이 일지를 쓰면서 얻은 바가 많았다. 그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생활을 가다듬었고, 작은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게 생각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이제 그럴 기회가 사라지는 셈이니 새내기 딱지를 떼는 반가움 못지않게 섭섭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새내기 티를 벗는다고 배태랑 농사꾼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봤자 얼치기일 뿐이고, 잘해봤자 반풍수를 넘기 힘들다. 아무리 용을 써도 그 수준을 벗어나기 힘든 게 농사꾼이다. 농사솜씨란 10년, 20년, 아니 평생을 매달려도 완성되기 힘든 것이지 싶다.
그렇다. 나는 이 꼭지를 끝내면서 “농사, 그거 별거 아니다”고, “시골살이 어렵게 생각 마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농사꾼이란 존재 자체가 어떤 ‘자격기준’을 갖춰 따내는 전문직이 아니다. 시골에 살면서 부담 없이, 또는 어쩔 수 없이 택한 삶의 방편이다. 이 점은 도시에 살면서 ‘전원생활’을 선망하는 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실 많은 사람이 전원생활을 꿈꾼다. 소외된 종속노동에 시달리는 노동대중 뿐 아니라 노동운동가 또는 전업활동가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전원생활’이 풍기는 뉘앙스는 헛된 꿈이고, ‘시골살이’라는 현실적 개념 또한 ‘로망’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운동가(활동가)들이 긍지를 잃지 않고 제몫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삶을 갈망하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다. 정년 뒤의 노후생활도 고민거리다. 이 때 시골살이는 주요 선택지의 하나지만 실제상황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무엇보다 ‘농사지으며 사는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큰 탓이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보기엔 ‘선입견’이다. 대부분 실제 겪어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하고 싶다. 시골살이가 간절한 소망이라면 한 1년 쯤 시험 삼아 살아보는 건 어떨까.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많은 걸 몸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면 1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잖은가.
내 경험에 비춰 보자면 기승전결을 갖춰 시골살이 기획안을 짜봤자 별 쓸모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철학이요, 가치다. 시골살이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단지 생활터전을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삶 자체가 바뀌는 일이란 얘기다.
생활의 편익, 경제적 풍요 같은 도시적 욕망을 간직한 채 자연만을 더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시골살이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농사를 짓지 않아도 좋다. 생태, 공생, 나눔 같은 가치를 좇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가난한 삶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으며, 그 ‘롤모델’의 하나라고 자부한다. 많은 게 부족했지만, 노동대중과 더불어 평등의 가치를 추구해온 삶이 결코 누추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함께하는 품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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