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9. 11:18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새해로 접어들고, 달포가 지났지만 이 즈음은 아직 ‘농한기’다. 물론 산업화 이전, 전통 농경사회에나 어울리는 얘기다. 세상은 이미 산업사회의 달력에 맞춰 돌아간다. 새해 첫머리의 여유가 채 가시기도 전에 농촌사회 또한 덩달아 부산하다. 벌써 이런저런 영농교육이 꼬리를 물고 있다. 낯익은 농사용어가 하나 둘 머리로 들어오면 한숨이 절로 난다. “이제, 좋은 시절 다 갔나?”
그러나 나는 ‘물색없다’는 핀잔을 들을망정 이런 분위기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 어디까지나 (음력)설을 쇠어야 새해인 거고, 정월대보름은 지나야 슬슬 농사철로 접어드는 거다. 다시 말해 ‘좋은 시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농한기가 뭐길래 이리 설레발을 치느냐? 물론 돈(자본)이 주인 노릇을 하는 산업사회와는 동떨어진 얘기다. 길들여진 소비수준과 사회적 위신, 욕망을 좇으려면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니까. 소외된 노동을 감수하면서 누리는 삶이나 행복한 삶은 자꾸만 미루게 된다. 일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이에 견줘 농한기는 가히 딴 세상 얘기다. 1년에 서너 달을 빈둥빈둥 놀고먹을 수 있다니 놀랍지 않겠는가. 말 그대로 좋은 경치와 훌륭한 볼거리, 맛있는 먹거리 찾아 산으로, 바다로, 명승지로... 한 마디로 ‘오감만족’이다. 그곳이 해외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여건, 특히 돈이다. 그 여건이 받쳐주지 않아서 눈물 머금고 단념하거나 ‘소비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어 그렇지 누구라도 꿈꿀 법한 ‘로망’임에 틀림없다. 나 또한 지난해까지는 틈나는 대로 이리저리 쏘다녔더랬다. 감성적 욕구도 채우고, 견문도 넓히고 오죽 좋은가. 안 그래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00곳’ 따위의 유혹이 넘쳐나는 시대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문득, 인생살이가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깨달았다. 자꾸 일을 벌이기보다는 갈무리에 힘쓸 때라는 말이다. 죽기 전에 어딘가를 꼭 가보는 것도 좋지만 죽기 전에 ‘꼭 깨우쳐야 할 것’ ‘꼭 알아야 할 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성찰하고, 탐구하는 일이다.
지난 한 달 남짓 ‘동안거’에라도 들어간 듯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무슨 면벽참선을 한 건 아니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자꾸만 쌓여가는 책 더미를 볼 때마다 조바심이 일었더랬다. 겨우살이를 위해 장작과 먹거리를 쟁여놓듯 농한기에 읽을거리를 틈틈이 들여왔다. 하지만 어인 까닭인지 책은 생각만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래가지고는 지금 쌓아둔 책도 죽을 때까지 다 보지 못할 것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먹고 사는 일이 먼저다. 그러니 ‘GAP(농산물 우수관리제도)인증’이니, ‘친환경 인증’이니 하는 영농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친환경 벼농사모임을 꾸려 나름대로 공부를 해오지 않았던가. 사실 쉽지 않은 문제다. 계산기 두드려보면 답이 안 나오고, 다음 수확 때까지 버틸 일이 걱정이다.
그래도 사람이 어찌 밥만 먹고 살 수 있겠나. 이 겨울의 끝자락에서 밥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찾을 수 있기를. 완두콩20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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