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5. 23:18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4월이다. 매화는 벌써 꽃잎이 졌고, 개나리는 활짝 피었으며, 벚꽃은 머잖아 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꽃 사태’를 이뤘으니 어지럽도록 눈부신 시절. 바야흐로 봄이 왔다는 얘기다.
그런데 ‘봄’보다 ‘4월’을 앞세운 건 화려한 잔치에만 마냥 취해 있을 수 없는 탓이다. 영어권의 한 시인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다. 메마른 땅에 새싹이 움트고, 뭇 생명이 되살아나는 경이로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전해진다. 그러나 이 땅의 4월은 정말로 잔인한 달이 되었다. 채 뜻을 피워보지도 못한 수백의 어린 생명이 영문도 모른 채 스러져간 달이기 때문이다. 오는 16일이면 세월호 참사가 빚어진지 꼭 한 해가 되는 날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세월호의 시계는 그대로 멈춰 있다. 사태의 윤곽이 웬만큼 드러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세월호 특위 활동을 사실상 가로막는 내용의 시행령을 내놨다. 여기다 유족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배(보)상금 문제를 띄워 올렸다. 이를 둘러싸고 유가족을 욕보이는 온갖 언어들이 가슴을 후벼 파고 있다. 이렇듯 상황이 정치색으로 덧칠되면서 정작 중요한 재발방지 대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안전확보를 위한 규제‧감독 강화, 책임자를 엄벌하는 ‘기업살인법’ 제정 같은 제도적 장치도입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다.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모진 세월을 살다보니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을 비감하게 맞고 말았다. 사실 이런 사정이 아니라도 농사꾼이 설렘 하나로 4월을 맞을 순 없는 일이다. 두 가지 마음이 엇갈리게 마련이다. 어느 날 문득 ‘놀고먹던’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갔음을 깨달으며 아쉬움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연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이내 미련을 버리게 된다. 농사철이 벌써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이번이 네 번째다.
올해도 ‘쌀 전업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달 하순이면 천하없어도 볍씨를 담가야 한다. 그 시간표에 맞춰 겨우내 축 늘어져 있던 몸뚱이에 차츰 힘이 들어가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게다가 올해는 정초부터 ‘벼농사 공부모임’을 굴리면서 준비를 해오던 터였으니 농사철을 맞는 마음이 한결 여유로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농업-농가를 둘러싼 사정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이미 ‘살농정책’으로 공인받은 정부 농업정책은 거침이 없다. 특히 올해부터는 ‘관세화’를 통해 쌀이 전면 개방된다. 관세율을 둘러싸고 당국과 전문가들 사이에 전망이 엇갈리고 있지만 국내 쌀값이 어찌 될 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해 쌀값부터가 보란 듯이 10% 넘게 떨어졌더랬다.
하긴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이 나라 농업정책에 기대서 농사짓는 농사꾼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단언컨대 지금의 농정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살 길이다. ‘생산성’이나 ‘경쟁력’을 내세우는 정부의 논리는 땅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는 길이다. 우리가 믿을 거라곤 생태, 공생 같은 가치를 끈으로 소비자와 연대하는 것뿐이다.
제아무리 눈부시더라도 머잖아 이 봄날은 간다. 하지만 갈 때 가더라도 꽃잎, 봄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기를. 간밤 내린 비에 눈물처럼 떨어지지 말고. 월간 <완두콩> 2015년 4월호 고정칼럼 '농촌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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