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5. 18:58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이틀 내리 비가 내렸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을 흠씬 적셔주니 들녘엔 한껏 물이 올라 싱싱한 기운이 넘쳐난다. 오늘은 마침 겨울잠 자던 개구리 따위 깨어난다는 경칩, 이젠 꼼짝없이 봄이렷다.
우수 경칩은 온갖 미물을 깨우지만, 전통 농경사회 일꾼들한테도 슬슬 몸을 푸는 절기였다. 농사철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농사준비가 시작되는 건 본디 정월대보름부터다. 새해를 맞아 ‘설설’ 삼가다가 보름달 기운이 뻗치고 날이 풀릴 즈음, 풍년과 건강을 비는 것으로 농사철을 열어젖혔던 것이다. 정녕 그렇다. 벌써 보름 전 일이지만 올해 대보름을 생각하면 아직도 흥이 나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요즘 세상에 대보름은 전통사회의 유물일 뿐이다. 피붙이끼리 쇠는 설 명절은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지만 대보름은 마을공동체의 명절인 탓이다. 집안 살림에서 농사 비중이 줄어들고, 그나마 축산, 시설채소, 원예, 특작 따위로 제각각이라 시골에서도 마을잔치는 그리 절실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공동체를 살리자면 거꾸로 대보름잔치 만한 게 없다. 그런 까닭에 지난해 우리 동네 ‘청년모임’이 앞장서 대보름잔치를 꾸렸던 거고.
올해는 판이 더 커졌다. 이번엔 벼농사모임이 먼저 나서 놀이판을 짜고, 마을 청년모임은 작년처럼 소머리국밥을 준비하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여기저기 땔감을 그러모으고 대나무를 베어다가 달집을 세웠다.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오곡밥을 짓고, 보름나물을 무치고, 갖은 먹거리를 마련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마을 어르신들께 점심을 대접하면서 잔치가 시작됐다. 어스름이 깔리자 달집을 세운 마을 앞 논배미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금세 왁자해졌다. 현장에서 급조한 풍물패였지만 몇 번 호흡을 맞춘 끝에 왕년가락이 되살아난다. 덩실덩실 춤판이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확 달아오른다. 아이들은 불 깡통을 돌리고 불장난을 하느라 신이 났다.
동녘 하늘에 둥근달이 떠오르면서 소원지를 매달아 둔 달집에 불을 댕겼다. 엄청난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활활 타오르자 일시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여기저기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모습도 눈에 띈다. 다시 풍물가락이 울리고, 불길을 싸고도는 기다란 행렬의 강강술래가 펼쳐진다.
저녁나절 시작된 잔치는 밤이 이슥해서야 막을 내렸다. 달집은 그 사이 모닥불로 잦아들었고, 잔치끝판이 아쉬운 몇몇이 둘러앉아 민요가락으로 마지막 흥을 돋운다. 그 모닥불마저 사위어들면서 잔치는 끝났다.
마을잔치는 더불어 하나 되는 ‘어울마당’이기도 하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한테는 ‘풀이’이기도 하다. 한풀이, 넋풀이, 신명풀이... 돌아보면 지난 가을걷이 이래로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다. 농민과 농업을 희생양으로 다루는 살농정책이 분에 겨웠고, 이 작은 지면 또한 노여움과 하소연으로 넘쳤더랬다. 지금도 몹쓸 농정은 여전하지만 신명나는 잔치판에서 그나마 맺힌 응어리를 풀 수 있었다. 조금은 숨통이 트인달까. 아울러 긴 터널을 지난 듯 마침내 밝고 훈훈한 얘기를 싣게 된 것도 여간 반갑지 않다.
모쪼록 그 대보름 기운 받아서 모든 시름이 봄눈 녹듯 스러지기를. 월간 <완두콩> 2016년 3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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