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숨이 차다

2017. 5. 1. 23:25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하나 둘, 눈부시게 피어났던 봄꽃들은 그 어느 날 눈물인 듯 꽃잎을 떨군다. 봄날의 꽃 잔치는 그렇게 이어지다가 신록에 자리를 내주는 거다. 봄이 꽃이라면 이 봄은 벌써 끝자리에 걸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봄이란 누구에게는 바람이요, 또 다른 누구에게는 생명이다. 물론 그 모두이기도 하지.


5월이 열리면서 새로운 이정표를 만나게 됐다. ‘촛불대혁명의 결실이면서, 이름부터 화사한 장미대선이 치러지고 있다. 이미 밝혔듯이 우리 사회에 급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생태 가치가 널리 퍼지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면 한다. 선거이슈에서 농업-농촌 의제가 사라진 것은 그 점에서 아쉬운 일이다. 하긴 처음부터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할 것도 없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세상이 생태 가치에 눈을 뜰수록 농사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질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나로서는 넉 달 남짓한 집짓기 공사가 모두 끝나고, 5월을 새 집에서 맞게 되었다. 돌아보면 손수 건축공사에 참여해 일손을 보태다보니 집이 되어가는 모양을 하나하나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앞 다투어 나름껏 힘을 보태준 동네사람들이 함께 지은 집에 살게 되어 여간 흐뭇한 게 아니다.


시공사(서쪽숲에나무집협동조합)부터 동네에 자리 잡았고, 목수들 또한 다수가 동네사람이다. 어떤 이웃은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도와주었다. 직접 일손을 보태지는 않았지만 내 부탁으로 가구와 집기, 도배지, 조명기구 따위를 골라준 이들도 있고, 음식솜씨를 발휘해 목수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대접해준 이도 있다. 심지어 막판 건축비가 모자라 쩔쩔 매고 있을 때 펀드를 조성해 급한 불을 꺼준 이들까지.


이렇듯 함께 지은 집인 만큼, 여러 차례 밝힌 그대로 이 집이 더불어 누리는 공간으로 쓰일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으로 여길 참이다.


새 집은 사람들이 소금바우라 부르는, 지금까지 살아온 곳 바로 옆 마을이다. 그러니 정든 마을을 떠나는 서운함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행정구역으로는 고산면에서 비봉면으로 바뀐다. 더는 고산 어우리 사는 귀농인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삿짐 싸느라 북새통인 와중에 느닷없이 올해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벼농사모임에서 함께 볍씨를 담그기로 한 날이 하필 그날이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태 전부터는 유기농작목반에서 열탕소독을 해서 볍씨를 공급하고 있어 볍씨 담그기는 염수선만으로 싱겁게 끝났다.


염수선이란 소금물의 높은 비중을 활용해 튼실한 볍씨를 골라내는 일이다. 커다란 고무통에 물을 받아 소금을 풀어 달걀을 이용해 적정한 비중을 맞춘 다음 볍씨를 쏟아 떠오른 낱알을 뜰채로 걷어낸 뒤 가라앉은 낱알을 망자루에 담는 것으로 끝난다. 이를 낮에는 찬물에 담고, 밤에는 꺼내놓기를 거듭하면(냉수침종) 조만간 볍씨에서 눈이 트고 한해살이 대장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5, 꽃잎이 진 자리에 새 잎이 돋아나면 살랑대던 봄바람도 차츰 잦아들 것이다. 그 자리에 뭇 생명들의 또 한 번의 한해살이가 시작되었다. 농사꾼의 곡진한 한해살이도 거기에 맞춰 펼쳐진다. 한 번 쯤 기대를 걸어보고 싶은 희망의 시절, 막바지로 치닫는 이 봄은 숨이 차다월간 <완두콩> 2017년 5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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