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4. 17:52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산자락 풍경이 싱그럽다. 말 그대로 짙은 녹음. 어라? 그 새 밤꽃도 피었네! 그러고 보니 울려오는 산새 소리가 이따금 “유월~ 유월~”로 들린다.
농사꾼에게 6월은 모내기철이다. 모내기를 열흘 남짓 앞둔 지금은 한창 논배미를 만드는 때다. 써레질을 앞두고 논바닥을 잘게 부수는 ‘로터리치기’, 물 잡고 물꼬내기, 논두렁 다지고 풀베기... 모내기가 끝나는 이 달 하순까지는 숨 돌릴 틈 없이 바삐 돌아갈 참이다.
거 참, 이 시점이 좀 애매하게 됐다. 시작도 안 한 모내기 얘기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시답잖게 논두렁 풀 베는 얘기를 쓰기도 그렇고. 해서 보름 전 일이라 ‘시의성’은 좀 떨어지지만 집들이 얘기를 해볼 테다. 보통 집들이와 달리 제법 유난을 떨기도 했거니와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테니 기록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겠다 싶기 때문이다.
내가 오십 줄을 한 참 넘어 손수 집을 짓게 된 사연과 공사과정은 이 꼭지에서 띄엄띄엄 다룬 바 있다. 요컨대 동네사람들이 힘을 보태 함께 지어주는 바람에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돼 지난 5월초에 이사를 했다는 얘기.
그렇게 이사를 하고 보니 여기저기 “빨리 집들이 하라”는 성화가 빗발쳤다. 집짓기에 워낙 많은 이의 신세를 지나보니 은근슬쩍 넘어가기는 애초부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관계망에 따라 잔치를 벌이자니 끝이 없을 것 같고. 게다가 시골살이의 관계망이라는 게 두부 자르듯 나누기도 모호하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잔치를 단번에 해치우기로 했다. 그리하면 잔치 준비에 드는 부담도 되레 덜 할 듯싶었다.
열흘 전에야 날짜를 잡고, 준비에 들어갔다. ‘완공축하 작은 음악회’라는 콘셉트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터라 프로그램을 짜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수성찬 차려 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니라 동네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공연 출연진 또한 서툴지라도 동네사람들로 채웠다. 동네를 주름잡는 재주꾼들이 너도나도 행사기획팀에 합류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주었다.
집지을 때부터 동네사람들 신세를 많이 지다보니 잔치 준비에도 태연히 손을 벌릴 만큼 낯이 두꺼워졌다. 음악회에 필요한 음향과 집기 따위는 고산에 자리를 잡고 연중 문화행사 ‘스테이 풀리시(Stay-foolish)’를 주관하는 기획사의 도움을 받았다. 역시 고산에 터 잡은 우리집 시공사 서쪽숲에나무집은 계단을 타고 오르는 어마어마한(?) 무대를 설치해주었다.
아무리 소박한 잔치라지만 음식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일. 이 고장 로컬푸드 음식점에 맡길 요량이었는데 휴일엔 출장서비스를 하지 않는다지 않는가. 일이 궁해지니 믿을 건 또 동네사람들 뿐. 동네 공동부엌 ‘모여라 땡땡땡’ 운영진한테 사정했더니만 그 자리에서 승낙해주었다. 나아가 솜씨 좋은 누구는 전 붙이고, 누구는 콩나물국 끓이고, 누구는 강된장 만들고... 동네사람들을 엮어냈다. 함께 준비하고, 함께 즐기는 시골마을의 옛 전통이 되살아난 듯했다.
마침내 잔칫날. 작은 산자락에 자리 한 동네가 와글거렸다. 다들 살짝 상기되어 “무슨 면민의 날 행사 같다”고. 이어진 동네 아이와 어른들, 실력을 갖춘 ‘프로 뮤지션’의 공연에 연신 앙코르를 외치며 환성을 내질렀다. 이 특별한 집들이의 여운은 초여름 밤이 이슥하고, 쌀쌀한 밤공기에 모닥불을 피울 때까지 가시지 않았고.
잔치가 끝난 지 보름이 지났지만 그 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흥이 살아난다. 이번 일로 기둥뿌리가 얼마나 흔들렸는지는 모르지만, 이리 함께 즐기는 판을 마련한 것으로 나는 족하다. 월간 <완두콩> 2017년 6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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