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폭폭한’ 겨울날

2017. 12. 4. 16:04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벌써 12월이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소회보다는 이젠 꼼짝없이 겨울이라는 스산함이 더 앞선다. 그도 그럴 것이 앞산을 쳐다봐도, 뒷산을 둘러봐도 수목의 빛깔은 한결 칙칙해졌다. 이젠 단풍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나마 좀 더 지나면 우수수 떨어져 앙상해지겠지.


첫눈이 온 지도 열흘 가깝다. 제법 내렸는데, 무엇보다 가파른 들머리길이 걱정이었다. 눈이 많이 쌓이면 자동차가 드나들기 어려운 탓이다. 거리가 족히 2백 미터는 되니 제설작업도 녹록치가 않다. 다행히 그날은 자동차가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지만 정말 큰 눈이 오면 어쩌나 싶어진다. 눈 덮인 산자락과 둔덕이 그려내는 눈부신 설경이며 겨울나무가 연출하는 눈꽃잔치 따위를 들먹였다간 누구 말마따나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로 퉁맞기 십상이겠다.


그러고 보니 글머리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사실 이번 겨울을 맞는 느낌이 여느 해와는 사뭇 다르다. 애써 가꾸고 잘 갈무리해 든든한 겨울, 바깥엔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불지만 집안은 훈훈하고 아늑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뒤숭숭한 겨울.


요즘 마음이 그렇다. 오늘 아침도. 그새 미뤄오던 도지쌀을 실어 날랐다. 부치고 있는 논 임대료를 쌀로 내는 현물지대인 셈이다. 보통은 현금으로 환산해 지불하지만 굳이 쌀로 달라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양이 좀 되어 트럭 짐칸에 실은 쌀 포대가 제법 수북하다. 계산속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돈 대신 곡간에 그득한 쌀로 도지를 치르면 일단 마음은 가볍다.


지금은 희미해졌지만 농촌에서는 쌀을 거래할 때, ‘사고-파는개념이 거꾸로 통용됐었다. 쌀을 남한테 넘겨줄 때 쌀을 샀다”, 쌀을 들여올 때는 쌀을 팔아왔다그랬다. 시골에서는 돈이 귀하니 쌀을 주고 돈을 사왔다는 돈 중심의 표현이 그리 굳어졌다는 설명이 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요즘 그 옛 관행에 공감한다.


엊그제는 현금지대를 인터넷뱅킹으로 이체했다. 현물지대보다 액수가 훨씬 많다. 내친 김에 묵어 있던 기계삯이며 작업비, 농자재비 따위도 지불했다. 한꺼번에 목돈이 빠져나가니 계좌의 잔고가 푹 꺼져버렸다. 남은 빚까지 털어내고 나면 살림살이가 간당간당하다. 빚은 목돈으로 한꺼번에 갚아야 하는데, 거둬들인 쌀(나락)은 곳간에 쌓인 채 시나브로 감질나게 팔려나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게 농사꾼의 숙명이라나 뭐라나.


어쨌거나 도지쌀 실어다주고 코가 쑥 빠져 집안에 들어서니 또 다른 험한 꼴이 기다리고 있다. 울안에 심어둔 단풍나무 줄기가 모조리 잘리고, 밑둥은 허옇게 껍질이 벗겨져 있다. 그야말로 살풍경이다.


남새밭에 나무그늘이 져 채소가 제대로 못 자란다고 하시기에 굴삭기 작업하러 올 때 옮겨심으마 했는데, 그 새를 못 참으시고 저런 참극을 펼쳐 놓으셨다. 채소도 안 자라는 이 겨울에. 애꿎은 나무가 불쌍하고 아깝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렇다 치고. 여러 얘기를 듣긴 했지만 몸소 겪어보기는 처음이라 어찌 대처할지 황망하기만 하다. 가슴 속은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하고, 휭 찬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래저래 겨울이다. 하긴 하얗게 눈 덮인 숲 속의 따뜻한 오두막집은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지. 겨울은 본시 북풍한설 몰아치는 계절이지. “겨울은 겨울다워야 제 맛이야. 지구온난화, 열대야로 뜨거워진 여름을 생각해보라고!” 나름 호기를 부렸었는데... 이번 겨울엔 기가 꺾였나? 벌써부터 봄이 그립다월간 <완두콩> 2017년 12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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