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허무할 때

2018. 1. 8. 15:32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20년이 흘렀네?”

“20년이 아니라 30년 전이네!”

영화 <1987>을 보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옆 동네 병훈 형님과 나눈 얘기. 다시 셈을 해보니 30년이 맞다. 세월이란 참...


벼농사모임 풍물패 장구연습이 끝나고 보기 시작한 영화는 자정 가까워 끝났다. 몹시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냥 헤어지기가 서운해 장구연습 뒤풀이를 겸해 술잔을 기울였다. 영화가 다룬 그 해, 내 나이 스물다섯. 그 때의 기억이며 무용담이 흘러넘칠 만도 했건만 그러지를 못했다. 6월 항쟁은 말할 것도 없고 뒤 이어 노동자들이 대투쟁에 나섰을 때도 나는 군대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의 자괴감까지 더해 <1987> 감상평은 술자리의 화제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 대신 세월의 덧없음이라 해야 할 비애가 밀려들었다. 아직 서른 중반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게 1987년은 까마득한 과거로 다가올 것이다. 몸소 겪은 당대사가 아닌 까닭이다. 나만 해도 30년 전이던 1987년의 격변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지만, 태어나기 10년 전에 끝난 한국전쟁과 그보다 10년 전인 일제강점기는 까마득한 과거사다. 그 거리감이란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멀다.


사는 세월도 덧없긴 마찬가지. 새해가 되니 나로서는 쉰보다 예순에 더 가까워졌다. ‘후줄근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언젠가 설핏 지나친 공익광고는 백세시대의 한평생이 하루라면 50대는 이제 막 점심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었다. 무릎은 치긴 했지만 어쩐지 현실감은 느껴지지 않았더랬다. 어쨌거나 어제 일처럼 생생한 당대사가 차곡차곡 쌓이는 어느 순간에 우리 또한 과거사의 한 조각이 되는 것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희망차야 마땅할 새해 첫머리와 어울리지 않는 군소리를 늘어놓았지 싶다. 세월 탓이겠지만 그보다는 생활의 변화가 크지 않은 시골살이에서 비롯된 심성이지 싶다. 게다가 지금은 시계가 느릿느릿 돌아가는 농한기 아니던가. 해가 바뀌어 무술년이니 황금개띠니 술렁이는 모양이지만 내가 깃들어 사는 산기슭은 고요하기만 하다. 이번 겨울 들어 매서워진 날씨까지 더해 보통은 두문불출에 동안거 형국이다.


그렇다고 마냥 틀어박혀 사는 건 아니다. 엊그제처럼 영화도 보고, 일주일에 한 번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장구채를 휘두르기도 한다. 장구를 시작한 지 어느덧 한 해가 다 되어가지만 실력은 영 시원찮다. 이 또한 세월 탓이지 싶지만 누구 앞에서 뽐낼 일 없으니 조바심 낼 것도 없다. 그저 흥이 나는 대로 누리면 그만이지.


마음 조릴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집밥 해먹는 이들이 갈수록 줄면서 곡간에 쌓인 나락()도 좀체 줄어들지 않는 거다. 그래서 기가 꺾였나? 농사철은 멀었어도 미리 챙겨야 할 게 수두룩한데 엉덩이는 천근처럼 무겁고 손발도 둔하기만 하다. 여느 해 같으면 이미 움직이고 있어야 할 벼농사모임도 반년 가까이 맥을 놓고 있다.


새해와 어울리지 않게 을씨년스럽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농사지으며 태평하게 산다고 늘 행복한 건 아니니까. 형편이 좋지 않다고 해서 언제까지 힘들지는 않을 테니까월간 <완두콩> 2018년 1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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