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5. 17:45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정월대보름은 뭐니 뭐니 해도 달집이고, 그게 확 타올라야 제 맛이다. 갖은 보름나물에 오곡밥을 차려내고, 뜨끈한 소머리국밥과 푸짐한 안주에 막걸리가 몇 순배 돌더라도 그 불길이 없으면 안 될 말이다. 여기에 십 몇 명이 쿵쿵 울려대는 풍물가락이 얹히면 금상첨화겠다만 자원이 모자라니 어쩔 수 없다 치고.
조금 전 마무리된 고산 어우마을 잔치판 풍경이다. 일렁이던 불꽃이 스러져 화톳불로 남고, 동네 꼬마들이 깡통에 담아 휘돌리는 쥐불놀이도 잦아들면 잔치판은 파장에 이른다. 지금은 돌아와 산마루에 걸친 보름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뭐랄까, 큰 강을 건넌 느낌?
사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우리동네’였는데 이제 ‘옆동네’다. 이제는 ‘손님’ 처지가 되어 멀뚱히 잔치판을 바라보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려니 참말로 거시기하다.
“소금바우로 이사 가더니 어째 토옹 발걸음을 안 헌댜?”
마주치는 어르신마다 그 한 마디를 빼놓지 않는다.
“농사철 다 됐으니 이제 자주 볼 거예요”
입막음 삼아 실없이 대꾸했지만 꽤나 겸연쩍다. 실은 정월대보름이 다가오면서부터 내내 껄쩍지근했더랬다. 요 몇 해 동안 우리 벼농사모임을 중심으로 대보름잔치를 꾸려왔는데 이번엔 그러지를 못한 탓이다. 지난해는 판을 크게 키워 의욕적으로 준비해온 잔치가 갑자기 터진 구제역 파동으로 취소됐었는데 올해는 아예 시작도 못했다.
준비가 어찌 돼 가는지 물어오는 이도 더러 있고 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아침 일찍 동네 톡방에 이를 알렸다. 요컨대 ‘그 동안 벼농사모임이 중심이 돼 대보름잔치를 마련해왔는데 올해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준비를 못했으니 잔치 관련 정보를 공유해서 참여하자’는 것.
요행히 어우마을 이장과 청장년층이 나서 해마다 잔치를 벌여온 그 논배미에 달집도 세우고 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원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뜻과 힘을 모은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농가가 주류인 토박이들은 시설물 설치와 오곡밥 따위 먹거리를 맡고, 대부분이 직장인이자 학부모인 귀촌인들은 소머리국밥과 불깡통, 폭죽 따위 아이들 놀이기구를 맡는 식으로 소임을 나누었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이 나서니까 확실히 음식이 달라졌다”는 칭찬이 쏟아지고, 서로를 추켜세우는 흐뭇한 정경이 펼쳐졌다.
다시 올려다본 보름달은 하늘이 흐린 탓인지 그다지 휘영하지 않아 보인다. 활활 타오르던 달집 불길의 여운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라면 대보름잔치 준비도 버거울 만큼 슬럼프(?)에 빠진 벼농사모임에 생각이 미쳐서일까?
사실 지난여름, 백중놀이를 볼품없이 치른 뒤로 모임은 맥이 풀려버린 듯하다. 농사일이야 어찌어찌 함께 품을 나누지만 그 밖에 삶에 기운을 불어넣는 일은 엄두를 못 내온 터다. 가을걷이 기쁨을 나누는 풍년잔치도, 생태농사의 가치와 농법을 배우는 농한기강좌도 모두 건너 뛰어왔다. 그저 매주 한 번 서넛이 장구를 배우는 풍물패만이 명맥을 이어주는 형편이다.
그래도 농사철이 닥치면 어찌 되었든 움직이긴 할 것이다. 그 동안 많이 쉬었지 싶기도 하다. 어우마을 대보름잔치를 떠올리며 깨닫는다. 뜻을 모아 더불어 힘을 쓰면 까짓것 어려울 게 무엇이냐고. 걱정일랑 달집과 함께 태워버리고 이제는 강을 건너야겠다. 월간 <완두콩> 2018년 3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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