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 12:46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그야말로 봄기운이 넘실댄다. ‘극강 한파’에 눈물짓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매화는 이미 시들어가고 어느새 벚꽃 망울이 터졌다. 한낮엔 벌써 초여름과 진배없는 날씨다. 온누리에 생명력이 넘쳐 난다.
지난가을, 고대하던 산행도 마다하고 홀로 사흘을 낑낑대며 심어놓은 앞마당 잔디는 새순이 돋아 제법 파릇파릇하다. 그 앞마당에 어떤 나무를 심을지, 왼쪽 텃밭은 또 자리를 어찌 나눌지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온 지 오래다. 오늘은 이웃과 함께 소양 나무시장을 찾아 묘목을 잔뜩 사왔다. 대부분 꽃나무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골짝엔 봄이 되었어도 꽃을 구경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아직 옮겨심기도 전인데 머릿속에는 이미 눈부신 꽃대궐이 들어앉아 있다.
꽃도 꽃이지만 농사철도 코앞이다. 밭농사가 시작된 지는 이미 오래지만 내 전업인 벼농사는 아직도 달포는 지나야 한다. 엊그제는 농협에서 마련한 벼농사 중심의 연례 친환경 영농교육을 받고 왔다. 내용도 뻔하고 지루한 시간이지만 빠지기 않고 참석한다. 농사철을 앞두고 처음 모이는 자리니 만큼 몸과 마음을 다잡기엔 더 없이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달포가 남았다고는 하지만 마음만은 이미 벼농사에 접어들었다. 더구나 여느 해와 달리 지난겨울은 <농한기강좌> 같은 ‘예열’도 없었으니 준비작업이 더 빨라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때로는 이런 조바심이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지난 주말, 우리 벼농사모임은 전체회의를 열어 체계를 갖춰 새롭게 출발하기로 뜻을 모았다. 회칙을 마련하고 조직운영과 재정체계도 분명히 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조바심’ 때문만은 아니다.
2014년 겨울 첫발을 내디딘 벼농사모임은 지난 3년 동안 ‘포트모 시스템’을 바탕으로 유기농 벼농사를 함께 지어왔다. 손수 농사를 짓는 회원 뿐 아니라 ‘건강 먹거리, 식량주권, 생태적 삶’이라는 가치에 공감하는 훨씬 더 많은 비농가가 함께 해왔다. 두레 정신에 따른 협동농사와 공조가 기본이었지만 백중놀이, 풍년잔치, 대보름놀이 같은 생태적 삶을 나누는 일도 꾸려왔더랬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무척 모호했던 게 사실이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얘기했듯 조직은 실상 ‘무정형’이었다. 규약도, 의사결정체계도, 사업집행단위도, 재정시스템도 갖추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름조차 ‘벼농사모임’이라는 보통명사로 통용됐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회원들의 뜨거운 열기에 힘입어 모임은 고산 일원에서 제법 의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문제는 한 두 번일지라도 회원들의 열정이 수그러들었을 때다. 그 위기국면을 수습할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여름 백중놀이를 볼품없이 치른 뒤부터 모임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도 이런 한계 때문이다. 벼농사모임의 이번 ‘체계정비’는 반년이 넘는 성찰과 모색의 결과다. ‘고산권 벼농사두레’라는 이름도 짓고,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나눠 출자금과 연회비에 차등을 두었으며, 임원진을 구성해 사업집행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로 한 게 핵심이다.
이 새로운 흐름 때문일까? 벼농사모임의 전체 경작면적은 지난해보다 늘었고, 농가회원(정회원)도 늘어났다. 뭐, 그 흐름 때문이 아니라도 좋다. 새 순을 힘차게 밀어 올리는 봄기운만으로도 농부의 가슴은 벅차오르니까. 월간 <완두콩> 2018년 4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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