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 두 가지 풍경

2018. 4. 30. 13:50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봄빛!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그새 꽃 잔치는 끝나가지만 돋아나는 연두 빛 여린 잎으로 하여 들녘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봄이 불타고 있는 것이지. 불현 듯 저 속에 녹아들어 형체도 없이 사라졌으면 싶은 게 현기증이 일어난다. 그래서 봄인가?


실은 요 며칠 마음이 뒤숭숭하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앞산 숲이 사라지고 있었다. 요란한 기계톱 소리와 함께 서 있던 나무들이 하나 둘 쓰러지는 거다.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린다.


사연을 소상히 알 길은 없지만 짐작컨대 다 자란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묘목을 심는, 임업의 한 공정이 펼쳐지는 듯하다. 벌채한 나무는 상태에 따라 목재나 장작 따위로 나눠 실어내고, 잔가지는 그 자리에 줄지어 둔다. 나무가 우거졌던 울창한 숲이 졸지에 거칠고 메마른 얼룩무늬 민둥산으로 둔갑하는 것이다임업의 경제논리를 어찌 거스를 수 있겠냐마는 그 삭막한 풍경을 몇 해 동안 견뎌내야 하는 동네 사람들은 갑갑하기만 하다.


앞산 벌목이 시작되던 바로 그날, 비봉 돼지농장의 축사환경 정밀조사결과를 발표하는 주민설명회가 열렸다. 뜻밖에 많은 주민들이 몰려 면사무소 강당을 가득 메웠다.


1만 마리 넘게 기를 수 있는 초대형농장인데, 폐수를 몰래 흘려보내다 들켜 10년 가까이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손꼽히는 농축산재벌인 이지바이오 계열 부역육종이 인수해 저 지난 겨울 재가동을 꾀했다가 주민들의 거센 항의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면서 군청과 주민, 회사 3자가 함께 환경, 건축 등 관계 전문가군에 조사용역을 주어 정밀진단을 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주민설명회는 바로 그 용역보고서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설명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보고서 내용에 거세게 반발했다. 농장을 재가동 했을 때 예상되는 주민피해가 전혀 분석되지 않은 가운데 1~7천 마리 사육두수에 따른 재가동 시나리오만 제시한 탓이다. 조사과정과 용역비 관련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분위기는 더 거칠어졌다.


주민들의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악취를 없앨 근본대책을 세우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니 재가동을 포기하고, 언제라도 매입할 의사를 밝힌 완주군에 농장을 넘겨라!”


반경 2~3키로 안에 대형아파트 단지 두 곳(봉동 둔사리, 백제예술대)과 테크노벨리 산업단지, 고산읍내를 비롯해 2만 명 남짓한 인구가 밀집된 곳에 악취를 내뿜을 초대형 돼지농장을 돌리겠다니. 어찌 뒷감당을 하려는지 그 무모함이 차라리 어리둥절하다.


그러고 보니 4, 비록 끝자리를 지나고 있긴 하지만 이래저래 잔인한 달이 맞지 싶다. 그런 탓에 역사적인남북 정상회담도 건둥건둥, 오랜만의 봄나들이도 싱숭생숭. 어젯밤 건져놓은 볍씨를 아침 일찍 찬물에 다시 담가야 하는데 점심이 지나도록 깜빡했다. 작목반에서 손수 열탕소독까지 해서 공급하는 유기농 볍씨다. 엊그제 소금물로 쭉정이를 골라내 닷새 남짓 침종(물에 담가 불리는 작업)을 할 참이다. 이어 모판에 볍씨를 넣어 사나흘 숙성시켰다가 못자리에 앉히게 된다. 그렇게 모농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노동절에서 어린이날로 이어지는 5월초의 황금같은 나날에 구슬땀을 흘리게 될 벼농사두레 도반들한테는 미안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생명을 일으키고, 생태를 살리는 거룩한 길 아닌가. 월간 <완두콩> 2018년 5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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