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4. 12:52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6월 문턱을 넘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들녘은 온통 이글거린다. 수은주는 섭씨 30도를 우습게 넘어버린다. 바람은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의 훈김처럼 후끈거린다. 모내기를 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기가 죽는다.
오늘 열린 이 고장 잔치판 <풍년기원 단오맞이 한마당>에서도 사람들을 빨아들인 건 물이었다. 장판 위에 물이 흐르도록 해 미끄럼을 타는 놀이시설부터 한낮에 홀연히 나타나 굵은 물줄기를 행사장인 학교 운동장에 뿜어댄 소방차까지 다들 타오르는 열기를 식히기에 바빴다. 씨름판의 뜨거운 열기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초여름의 이상 열파.
그래도 잔치는 잔치다. 동네 초등학교의 전통문화 체험행사에서 지역축제로 판이 커진 지 올해로 삼년 째. 아이들은 씨름판의 승부욕에 빠져들었지만 핵심 프로그램은 뭐니 뭐니 해도 ‘모내기 체험’이다. 올해는 얼마 전 공식체계를 갖춘 우리 <벼농사두레>가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다. 우리가 길러온 모판을 가져다, 못줄을 잡고, 모내기 작업을 이끈 것. 미리부터 진행계획을 짜고, 저마다 할 일까지 나눠맡으니 훨씬 효율적이고 실수도 막을 수 있었다. 일이 닥쳐서야 현장에서 사람을 끌어 모으고 팀워크를 급조하느라 바삐 종종거리던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요즘 벼농사는 거의가 혼자 한는 일이라는 점이 버겁게 다가온다. 모내기를 앞둔 요즘은 ‘논 만들기’가 한창이다. 논두렁을 보강하고, 물길을 내며, 논갈이(로터리)를 하는 등 모내기를 할 수 있도록 논배미를 꾸미는 일이다. 그 가운데서도 논둑치기가 고단하기로 첫 손에 꼽힌다. 사실 트랙터에 장착하는 ‘논두렁 조성기’라는 기계를 쓰면 일손을 크게 줄일 수 다. 그러나 나는 트랙터도 갖추지도 못했고, 게다가 올 봄에는 비가 자주 내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예초기를 등에 짊어지고 일일이 논둑 풀을 베어왔던 것이다. 휘발유 엔진으로 강철 칼날을 고속 회전시켜 풀을 베는 기계다.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기계진동 때문에 근육에 무리를 주어 두어 시간을 돌리고 나면 저도 모르게 팔뚝이 덜덜 떨린다.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거나 구멍이 뚫린 논두렁도 삽이나 쇠스랑으로 일일이 보강해야 한다. 논두렁 조성기로 쓰윽 갈고 다지면 그 만인 것을 맨손으로 처치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분이 나고 안 해도 되는 고생에 짐짓 처량해진다. 땡볕 아래일망정 그런 고달픔이 감성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나는 저 논만 보면 피가 끓는다’고 시귀를 살짝 비틀거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같은 시를 읊조리게도 하니 말이다. 웬 청승인가 싶을 게다. 스스로도 가끔은 멋쩍어지니까.
그게 사실은 협동작업(두레)과 홀로작업을 견주는 데서 비롯된 효과가 아닐까 싶다. 볍씨를 담그고 모판에 넣어서 못자리에 앉히기까지의 모농사 초반작업은 <벼농사두레>의 협동작업으로 진행됐다. 조직된 힘으로, 더불어 작업을 하면 그것만으로 효율이 높아지고, 심리적 만족감에 따른 시너지가 뒤따르는 법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광야에 홀로 던져진 듯 농작업을 감당해야 하니 그 팍팍함이 오죽할까 이 말이다. 그러니 오늘 단오잔치 모내기 체험을 통해 새삼스레 조직된 힘, 두레의 위력을 떠올린 것이렷다.
이제 모내기가 코앞이다. 체험은 손 모내기로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앙기가 해치운다. 다만 못자리에서 모판을 떼어 여기거기 흩어져 있는 논배미에 실어 나르는 게 큰일이고 숱한 일손이 필요하다. 이 또한 두레로 풀릴 것이다. 그러리라 믿는다. 월간 <완두콩> 2018년 6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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