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잔치를 하~겠어요

2018. 10. 1. 08:25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하늘이 파랗다. 조각구름이라도 몇 점 둥둥 떠다니면 저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시심을 일깨운다. 저무는 하늘은 더러 찬란한 빛으로 붉게 물든다. 설령 노을이 드리우지 않더라도 서쪽 하늘은 때로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인다. 시퍼렇게 날이 선 서늘한 아름다움이여!


이렇듯 날이면 날마다 색다르게 펼쳐지는 하늘을 이고 사는 것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농부가 누리는 특권이라면 특권이겠다. 가을걷이가 시작되기 전 달포 쯤 되는 기간은 쌀 전업농인 내게 짧은 농한기다. 가을걷이 준비는 이미 끝낸 상태. 벼포기 사이에 숨어 있다가 막판에 모가지를 올린 피를 솎아내고, 도랑을 치고 도구를 쳐 논바닥을 말리고, 콤바인(수확기) 작업에 걸리적거리지 않게 우거진 논둑풀도 쳐냈다. 그래 마음이 느긋해지니 이 눈부신 가을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날이면 날마다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고. 이 참에 그 동안 미뤄두었던 텃밭 만들기에 나섰다. 집을 짓고 나서 서른 평 남진 자투리땅이 남았는데 일찌감치 텃밭을 일구리라 점찍어 두었더랬다. 하지만 이런저런 토목건축 뒷정리와 논농사로 2년이 다 되도록 도무지 틈이 나질 않은 거다. 게다가 밭모양이 고구마를 닮은꼴이라 구획이 쉽지 않아 그리고 지우기를 거듭할 뿐이었다.


올해를 넘기지 않으리라, 머리를 다그쳐 얼마 전 구획안을 확정했다. 며칠 동안 바닥을 판판하게 고르고, 돌멩이를 들어냈다. 엊그제는 고벽돌을 사들여 구획선(통로)에 깔았다. 이어 큰 고무통을 묻어 연못으로 꾸밀 준비를 마쳤다. 이로써 기초작업은 마무리된 셈이다.


땅을 갈아 반듯하게 고랑을 내고 두둑을 쌓는 식의 흔한 텃밭 대신, ‘퍼머컬처원리를 바탕으로 자연에 가깝고 먹거리를 가꾸며 아름답기까지 한 생태정원을 꾸미는 게 목표다. 관리기나 트랙터 같은 기계를 써서 땅을 가는 대신 유기물을 덮어 땅속 생태계를 살리는 시트멀칭방식을 쓸 생각이다. 아직 어떤 나무, 어떤 채소, 어떤 꽃을 심을지 정하지도 못한 상태지만 벌써부터 온갖 꽃이 만발하고 풍요가 넘치는 숲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제 짧은 가을 농한기는 보름쯤 남아 있다. 그 사이 우리는 다시 잔치를 벌일 것이다. 황금들녘 나들이를 겸한 풍년잔치를. 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해는 이러저런 사정으로 열지 못했다. 올해는 벼농사두레가 공식발족하고 처음 마련하는 잔치라 뜻이 깊다.


이름 그대로 가을걷이를 앞두고 벌이는 자축행사다. 물론 지금으로선 풍년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풍년잔치를 연다고 시비를 걸 사람을 없을 것이다. 황금들녘은 수확철 벼가 여물어가는 논배미를 상징하는 말이다. 힘겨운 노동과 뜨거운 여름을 이기고 마침내 햇나락을 거둬들이는 서로를 위로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자는 뜻이다.


황금물결 넘실대는 들녘을 논둑길 따라 거닐며 이 가을의 풍요도 누려보고, 메뚜기 잡아 구워먹어도 보자는 것이다.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걸치고는 풍물 한 판 신나게 두드리고, 곱게 물든 잔디밭에서 추억이 아른대는 명랑운동회를 펼치잔다. 저녁시간에는 지난 한 해 벼농사두레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음주가무로 크게 어울려도 좋으리.


그래서 가을이다. 결실의 계절, 누구는 맺은 열매가 새로운 시작을 배태한 씨앗이기도 하다고 일깨운다. 옳은 말씀! 그러나 지금은 가을이 건네준 이 넉넉함과 설렘을 그저 내키는 대로 함께 누려보자. 월간 <완두콩> 201810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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