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3. 19:14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몹시 슬프다. 아니 서러움인 듯도 하다. 말기암 판정을 받고 4년 동안 혼신을 다해 투병해오던 후배. 끝내 허망하게 떠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창 때, 아까운 나이여서만은 아니다. 참 굴곡진 삶이었고, 어린 딸 하나만 달랑 남겨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오죽 무거웠을까. 의료진마저 “그만 내려놓으라” 할 만큼 예후가 좋지 않았지만 차마 놓지 못하고 초인적 의지로 버텨오던 친구. 그러니 어찌 서럽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숨붙이들의 숙명이라지만 잊을 만 하면 날아드는 또래 연배의 부고는 새삼 인생살이의 덧없음을 일깨워준다. 하여 탐내고 더 누리기 위해 ‘심기일전’하기보다는 더 내려놓고 비워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는 거다.
사실 후배의 비보가 아니었다면 이 글은 눈앞에 펼쳐진 농한기 얘기로 채워질 참이었다. 하지만 첫머리를 이렇듯 비감한 내용으로 장식하고 보니 꺼내기 민망한 얘깃거리가 되고 말았다. 슬픔이란 참 전이되기 쉬운 감정인 모양이다. 후배를 덧없이 떠나보낸 슬픔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슬픔을 불러내니 말이다. 그렇게 떠오르는 기억들 가운데 서글픈 듯도 하고 씁쓸한 듯도 한 해프닝 하나.
여러 차례 밝혔듯이 내가 지은 쌀은 ‘생산비에 바탕을 둔 고정가격’에 직거래로 공급한다. 때문에 생산비가 크게 오르지 않는 한 쌀값도 그대로다. 올해도 기계작업비와 농자재비가 거의 오르지 않아 4년째 같은 값에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쌀 시장가격이 크게 오른 걸 계산에 넣지 못했다. 아뿔싸! 쌀값 오른 줄만 알았지 그게 생산비 인상요인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것이다. 무슨 얘기냐고?
농지 임대료(도지)는 지금도 현물지대다. 다시 말해 “1마지기 당 쌀 1가마” 이런 식으로 임대료가 책정되고 한번 정해지면 거의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지급방법. 도지는 쌀로 책정하지만 지주가 현물(쌀)을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해 수확기에 형성되는 산지쌀값을 기준으로 현금지급 하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쌀 시장가격이 오르면 임대료도 그만큼 오르는 것이다.
올해 수확기 산지쌀값은 지난해보다 20% 남짓 올랐다. 전체 경비에서 임대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높은 편이라 생산비가 꽤 올랐음은 당연하다. 셈에 밝지 못한 내가 그걸 깜빡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그저 눈물 머금고 안내문이나마 ‘뒷북’ 때리는 수밖에.
“그래도 올해산 쌀값은 내년 가을까지 죽 그대로 받겠습니다. 다만 내년(2019년)산 쌀은 임대료를 비롯한 생산비 증가분을 쌀값에 반영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이 점 미리 헤아려주시기를...”
농사도 엄연히 밥벌이이니 정신 바짝 차릴 일이다. 드디어 돌아온 농한기에 들떠 “올해는 몇 해 동안 쌓인 곰팡내 나는 타성, 모질게 들이치던 미망, 부질없는 집착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물처럼, 구름처럼 떠돌겠노라” 호기롭게 다짐했더랬다.
이제 와 생각하니 철딱서니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이 추운 계절에 떠돌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 아니던가. 지금은 ‘만행’이 아니라 ‘동안거’에 들어갈 때가 아닌지. 아니 동안거도 언감생심 아닐는지. 밥벌이를 벌충하는 ‘땀나는 겨울’을 맞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월간 <완두콩> 2018년 10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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