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좀 살 것 같다고요?

2018. 9. 4. 10:42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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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붙이란 목숨붙이는 다 태워버릴 기세였던 무더위가 9월의 문턱에서 사그라졌다. 누구라서 계절의 변화를 이길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번엔 그 대가가 컸다. 사람들을 네댓새나 공포에 몰아넣었던 초강력태풍 솔릭은 뜻밖에도 수굿이 지나갔지만, 집중폭우가 한반도 곳곳에 내리칠 줄 누가 알았나.


대도시에 물난리가 나고, 농경지 곳곳이 홍수에 휩쓸려 땀 흘려 일군 한해 농사를 망쳤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들어붓는 빗줄기에 잠이 깨 이러다 집 떠내려가는 건 아닌지밤을 지새운 게 또 몇 날이던가. 그나마 우리 고장은 농경지-농작물이 잠기거나 봇물이 터지는 따위의 큰 피해는 없었던 모양이다. 불행중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 난리를 치르고서 더위는 물러갔다. “내년에 다시 올게!” 끔찍한 인사를 남긴 채로. 어쨌거나 더위가 가셨으니 세상은,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무더위 이전으로 돌아갔다. 한 달 남짓 속수무책으로 널브러졌던 몸과 마음을 추슬러 일과 삶 속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지.


가을이다. 8월에 진도 못나간 거는 무죄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어떤 이의 선언이다. 좀 멋지지 않나? 이거야말로 지금 내 심경을 그대로 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죄가 있고 없음이 문제가 아니다. 또 이제부터라도 진도 나가면 되는 것도 아니다. 농사라는 게 말이다. 누누이 얘기했지만 농사의 주인공은 농부가 아니라 작물이다. 작물은 농부들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다. 다 지들 스케줄대로 자랄 뿐이다. 공휴일이라고 성장을 잠시 멈추지 않는다. “지금 찜통더위 때문에 농부님이 당최 움직이질 못하니 혹서기에는 우리도 좀 쉬어가세!” 그랬으면 오죽 좋겠나.


실은 정반대다. 작물에게 무더위는 더없이 좋은 여건이다. 열대성 작물인 벼한테는 특히나 그렇다. 문제는 작물에만 좋은 게 아니라 양분경합관계에 있는 잡초한테도 좋다는 점이다.

무더위가 누그러지면서 다시 둘러본 논배미는 그새 많이 우거져 있었다. 검은빛을 띤 벼포기가 잔바람에 물결을 일으키며 생명력을 내뿜는다. 그런데 어우들 두 마지기에는 벼포기 대신 고춧대를 닮은 큰 키 풀이 온통 들어차 있다. ‘여뀌바늘이다. 한해살이지만 벼보다 높이 자라고 나중엔 목질이 단단해진다. 김매기를 다 끝냈을 즈음 싹을 틔우고 무더위 기간에 쑥쑥 자라 논배미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양분을 빼앗긴 벼포기는 새끼치기도 제대로 못해 고작 대여섯 가닥에 그쳤고 그마저 빼빼 말라 있다. 양분쟁탈전은 이걸로 끝이다. 지금으로선 백약이 무효다.


그래도 나는 저 여뀌바늘 무리를 죄다 베어냈다.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벼포기 사이를 헤집고, 작은 버들낫으로 하나하나 밑동을 잘라내자니 일이 여간 고역스럽지가 않았다. 사실 이제 와서 저 놈들 베어낸다고 해서 수확이 크게 늘지 않는다. 거기에 들인 공을 따져보면 손해도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다. 그런 걸 뭐하러? 저대로 두면 씨앗을 받을 것이고 내년엔 그것들이 모조리 싹을 틔워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갈 길이 구만리다. 무슨 열대밀림처럼 빽빽한 논두렁 수풀도 쳐내야 하고, 도랑치고 도구쳐서 물길도 내야 한다. 이 판국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힘을 빼고 있자니 폭폭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게 다 무더위 탓이야!


9, 바람은 한결 선선해졌지만 기후변화는 지금도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월간 <완두콩> 2018년 9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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