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을 나눈다는 것

2018. 11. 5. 14:07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황금물결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그 자리는 흙빛으로 텅 비었거나 그루갈이 양파나 마늘 모종이 들어찼다. 누군가 허허로이 물을지 모르겠다. 그 눈부시던 황금물결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그러나 허탈해 말 일이다. 신기루마냥 홀연히 사라진 게 아니니. 기름 자르르 김 모락모락 햅쌀밥으로 거듭나 지금도 누군가의 밥상을 풍요롭게 하고 있을 지니.


가을, 한 마디로 거둬들이는 철 아니던가. 옛사람들은 추수동장(秋收冬藏), 가을엔 거둬들이고 겨울엔 갈무리한다고 했다. 우리도 가을걷이를 끝낸 지 오래다. 그런데 요즘은 거둬들인 곡식(나락)을 갈무리하는 대신 한꺼번에 처분하는 게 보통이다. 국가수매제도가 폐지된 지 10년도 넘었지만 공공비축미 형태로 농협을 통해 매입하기 때문에 그 양상은 지금도 매한가지다.


쌀 농가가 생산물을 가을 한 철에 모두 처분하는 것은 나름의 판로를 갖추지 못한 점도 있고, 기계작업비와 여러 농자재비 따위 생산비를 지불하려면 목돈이 필요해서이기도 하다. 아무튼 수매기간이 지나면 농촌의 나락은 대부분 미곡종합처리장(RPC)이나 정미소 창고에 옮겨 쌓이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긴 하다. 자금력이 달리지 않고, 아주 큰 농사를 짓는 농민이라면 쌀값이 오르기를 바라고 사설 창고에 나락을 쟁여둘 수도 있다. 하지만 요 몇 년 쌀값이 내리막 외길을 걸어오는 바람에 이 또한 쉽지 않은 선택이 되었다. 또 다른 경우가 직거래다. 농산물 생산자와 소비자가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만나 유통비용을 줄임으로써 서로에 도움이 되는 유통방식이다.


여러 차례 밝혔지만 나는 지금껏 이 직거래를 통해 내가 지은 쌀을 처분해왔다. 거래하는 정미소에 나락을 맡겨두고 그 때 그 때 필요한 만큼 방아를 찧어 택배로 보내는 식이다. 생태농사의 가치에 공감하고, 직거래를 통해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이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것만으로 거둬들인 나락을 모두 소화하니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나는 이를 나눔이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여기저기 나눌 곳을 떼어두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 숫자가 줄어드는 게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 <고산권 벼농사두레> 협동작업에 품을 나눠준 이들을 비롯해 꼭 챙길 곳은 있게 마련이다. 어쨌거나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 직거래 쌀값으로는 생산비에 바탕을 둔 적정가격을 받고 있다.


한편 올해 처음으로 벼농사에 뛰어들어 벼농사두레와 함께 해온 새내기 농부 둘(<완두콩> 10월호-미순현정 씨의 벼농사 분투기)도 첫수확의 기쁨을 널리 나눴다. 두 마지기가 안 되는 농사였지만 쌀로 5백키로 넘게 거둬들였다. 둘은 도지와 겨울철 자가식량을 뺀 전량을 3키로 씩 나눠 담아 포장한 뒤 소중한 사람들에게 돌렸다. 우리집에 있는 용기와 밀봉기계를 써서 오순도순 포장작업을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나누는 건 쌀만이 아니다. 우리 벼농사두레는 올해 처음으로 햅쌀밥 잔치라는 걸 벌였다. 땀의 결실을 맛보며 한 해의 노고를 몸으로 느껴보자는 뜻이었다. 미역국과 김, 겉절이만으로도... 역시 햅쌀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날이 갈수록 황량해지고, 마음도 덩달아 쓸쓸하다. 하지만 나눌 수 있기에 이 가을은 그나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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