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 16:21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올해 벼농사가 첫발을 내디뎠다. 바로 어제, 첫 공정인 볍씨를 담근 것이다.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시시한 작업이지만 분위기는 진지하면서도 활기가 넘쳤더랬다. 나름 ‘뜨거운 한해’가 될 거라는 어림을 내비친 바 있는데 그게 터무니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무엇보다 고산권 벼농사두레 덕분이다. 사실 내가 짓는 벼농사는 이제 벼농사두레를 빼고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벼농사두레가 요즘 뿜어대는 기운은 그야말로 거칠 게 없어 보인다.
올해 정기총회는 한 달이 지나도록 그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다. 아무리 따져 봐도 그럴 까닭이 없는데, 2/3 가까운 회원이 몰려들었다. ‘멋진회원’에게 상을 주는 사전행사가 있었는데 내내 박장대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은 담당임원인 병수 형님 혼자서 준비했는데, ‘미순임파써블상’, ‘월드보라상’처럼 수상자 이름을 비튼 상 이름과 그 내력이 폭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전혀 뜻 밖에 나도 상을 받았다. ‘남호주연상’.
열기는 본행사인 총회로도 이어졌다. 약정된 시간을 지키기 위해 발언을 절제하면서도 참여의지는 뜨거웠다. 회원의 현장발의로 농지매입운동(트러스트)을 추진하기로 하고 일단 위원회를 꾸려 연구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회칙개정 순서에서는 집행부가 내놓은 원안을 물리치고 회원이 제안한 수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두레가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조직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그 참여 열기는 뒤풀이로도 이어졌고, 다들 “이렇게 재미있는 총회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런 힘찬 기운이 농사일에 옮겨 붙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신규경작 설명회’가 예상을 훨씬 넘어 성황을 이루더니 실제 경작자(정회원)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물론 다들 직장인인 만큼 나처럼 생계형 농사를 짓겠다는 건 아니다. 한 두 배미 지어 주곡을 자급하고 농사를 체험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실제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두레의 목적과 가치에 공감해 공동작업과 활동에 함께 하는 준회원도 꾸준히 늘고 있다.
어제 볍씨 담그기 작업에 생기가 넘쳤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고무 통에 물을 받아 소금을 풀어 비중을 높인 뒤 볍씨 80Kg을 쏟아 부어 쭉정이를 걷어내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갖출 건 다 갖춰야 하는 법. 일이 겹치는 바람에 작업에 함께 하지 못한 창수 씨는 막걸리 몇 통을 보내 미안함을 대신했다. 요즘은 쑥이 제철이니 안주로 전을 붙였다.
금세 일이 끝나니 싱겁기도 하고 뭔가 미진한 느낌은 인지상정이다. 마침 주말장터가 열리는 읍내 미소시장으로 몰려갔다. 병수 형님은 장인어른이 막걸리 빈병을 재활용해 만든 바람개비를 개당 5천원에 팔았다. 판매수입 가운데 3천원은 벼농사두레에, 나머지 2천원은 청소년단체 <온누리풀씨>에 기부하겠다며. 모두 10개를 준비했는데 네 개가 현장에서 팔리고 두 개는 예약주문을 받았다. 비록 완판은 못했지만 그래도 무척 흐뭇한 표정. 바로 옆 평상에서 술판이 펼쳐진 까닭이다.
이름 하여 ‘고산 아재들의 한잔상담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귀농귀촌, 집짓기, 육아, 교육, 생활 등’. 임경수 박사가 운영하는 곳인데 실제 상담이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다. 평상 위에는 막걸리며 맥주, 때로는 손수 빚은 가양주가 놓여 있다. “요리는 나의 본능”이라는 임 박사가 나름 참신한 안주를 선보인다. 다들 눈치 챘을 거다. 상담은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낮술 몇 잔으로 거나해진 이들의 머리 위로 봄빛이 눈부시다.월간 <완두콩> 2019년 5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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