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5. 10:25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 그리고 가을걷이를 끝낸 농부의 마음은 과연. 물론 그때그때 다르지. 올해는 허허롭다. 황금물결 사라진 들녘은 썰렁해 보이고, 몇 해 째 이어지는 흉작으로 가슴엔 스산한 바람이 인다.
우리 벼농사두레가 해마다 가을걷이를 앞에 두고 ‘황금들녘 풍년잔치’를 벌이는 까닭이 있다. 황금빛 물결이 뿜어내는 눈부신 색감과 풍요로운 느낌, 그것만으로도 ‘풍년’을 얘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사실 풍년인지 아닌지는 수확을 해봐야 아는 거다. 그 전에는 그냥 풍년이라 우긴다 하여 누구 시비 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잔치판이 벌어졌고, 그 열흘 남짓 지나 황금들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텅 빈 들녘은 때로 새로운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풍요의 땅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저 거무튀튀한 풍경으로 비치기도 한다. 사람마음이야 ‘희망’쪽에 붙고 싶은 거, 두 말하며 잔소리다.
챙길 건 챙겨야 하니 벼농사두레가 함께 지은 논배미에서 난 쌀로 가래떡을 빼서 손모내기 일손을 보탠 초중고 아이들에게 돌렸다. 마음이 스산할수록 수선을 떨어야 그나마 기력이 돌아오는 법. 이래저래 심란한 가운데서도 지난해에 이어 ‘햅쌀밥 잔치’를 또 벌였다. 무사하게 가을걷이를 마친 것에 감사하고, 한 해의 노고를 서로 위로하는 자리다.
이런 마음이 서로 통했던지 집안이 미어터져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말이지 집이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만큼. 물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 특유의 풍미가 유인요소가 된다. 반찬이 없어도 되는, 껏해야 겉절이와 김만 있어도 그만이다. 누구는 밥 자체가 ‘밥도둑’이라 그랬다. 준비한 밥이 모자라 두 번인가 더 지어야 했고, 저마다 싸들고 온 안주를 곁들여 막걸리가 몇 순배 돌았다. 신이 난 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숨바꼭질에 정신이 팔렸고, 누군가는 흥에 겨워 노랫가락을 뽑고, 누구는 또 기타연주를 하고... 돌아갈 때는 두 손에 햅쌀 꾸러미.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햅쌀밥 한 그릇의 풍요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이지바이오 돼지농장이라는 심란한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다.
업체쪽은 사육시설을 땜질하는 보수공사를 거의 끝냈다. 조만간 가축사육업 허가와 돼지입식 신청을 내겠다는 뜻을 완주군에 밝혀왔다. 거센 반대여론은 아랑곳하지 않는 거침없는 행보다.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지역사회와 ‘전쟁’이라도 치르겠다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저들이 저리 나오니 우리로서도 어쩔 할 도리가 없다. 단 한 마리 돼지도 들여보낼 수 없다. 그 순간부터 이 고장은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는 이참에 끝장을 보겠다는 결의로 ‘총력투쟁’을 선언했다. 지난달에 이어 서울본사로 쳐들어가는 2차 상경투쟁에 나선다. 이번에는 전세버스를 한 대 더 늘렸는데 그래도 자리가 모자랄 만큼 주민들의 호응이 뜨겁다. 이번엔 그냥 내려오지 않는다. 여세를 몰아 본사 앞에서 무기한 거점농성을 벌인다. 이지바이오가 농장 재가동 의사를 접는 그날까지 총력투쟁을 계속될 것이다.
이지바이오는 눈여겨보기 바란다. 심란한 마음이 거센 분노로, 뜨거운 투쟁의지로 거세게 불타오로고 있음을.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섣불리 일을 저질렀다가 끝내 ‘패가망신’에 이르지 않기를. 월간 <완두콩> 2019년 11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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