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5. 12:13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내리다 만 듯, 민망하긴 해도 첫눈이 왔다. 눈이 내렸고, 12월이 되었으니 정녕 겨울로 접어든 게 분명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싸돌다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음이다.
첫눈이 내린 오늘도 아침나절부터 이리저리 내달았다. 다 그 놈의 돼지농장 때문이다.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 현장취재를 나왔다. 돼지농장 앞 농성천막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질문을 하는 품새에서 사전취재를 꼼꼼히 한 티가 또렷하다. 비록 생방송은 아니었지만 질문-응답이 꽤 길게 이어지면서 바짝 긴장해야 했다. 농성조로 나와 있던 어르신들이 앞 다퉈 인터뷰에 응했다.
농장이 가동될 때 말도 못하던 돼지똥 냄새, 여름엔 문도 못 열어 둘 만큼 지독했다고. 비만 내리면 무단방류해 하천이 썩고, 지하수가 오염돼 도저히 쓸 수가 없었노라고. 10년 가까이 가동을 멈추니 이리 깨끗하지 않느냐고.
한 시간 넘는 현장취재가 끝나고 나서는 바로 앞 용동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농장에서 고작 3백미터 거리다. 농장이 들어선 비봉면 봉산리 다섯 마을 주민을 상대로 순회간담회를 열기로 했는데 그 첫 순서였다. 요즘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점심을 지어먹는다며 “찬은 없지만 많이 드시라”고.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 집행부가 나서 지나온 경과와 이후전망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엔 ‘계란으로 바위치기’지 싶었는데 갈수록 함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대응전략에서도 돌파구가 생기면서 이제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는 얘기에 다들 얼굴이 환해진다. 앞장서는 사람들이 정말 고생이 많다고, 뭐라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덕담이 이어진다.
실제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세가 수그러들기 쉬운데 되레 열기를 더해간다. 1차 때보다 두 배나 많은 사람이 강남본사 상경투쟁에 나선 날, 완주군에는 ‘가축사육업 허가신청서’가 접수됐다. 허가를 받아야 돼지를 들일 수 있으므로 업체로서는 이 관문을 반드시 넘어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아 보인다.
완주군 <가축분뇨 관리조례>에 따르면 돼지의 경우 반경 2Km 안에 5호 이상의 민가가 있는 경우 가축사육을 제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돼지농장 재가동이 불러올 지독한 악취와 그에 따른 주민의 고통, 자연생태 오염, 거대 양돈장의 각종 지분 잠식에 따른 지역경제 침해를 생각한다면 허가권을 쥔 완주군은 ‘불허가’ 처분을 내려야 마땅하다. 그것이 상식이다.
이 점에서 나는 “업체가 농장 부지를 매각한다면 언제라도 매입할 의사가 있다”는 박성일 군수의 거듭된 공언을 지지하며,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곡바람 세차게 부는 농장 들머리에는 지금도 작은 천막 하나가 서 있다. 칠순, 팔순 머리가 하얗게 새고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겹기만 한 어르신들이 겨울추위 속에서도 날마다 농성을 이어가는 현장이다. 지난 20년 묵은 지긋지긋한 고통이 이 참에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들이다.
업체쪽에 호소한다. 행정소송에 대비한답시고 순박한 동네인심 들쑤셔 반목 일으키고, 마을의 평화를 깨는 짓일랑 제발 그만두라.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농장 부지를 완주군에 양도하라. 월간 <완두콩> 2019년 12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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