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7. 14:56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입이 방정이었나. ‘올해는 날씨가 도와준 덕에 농사가 순조로운 편’이라 입방아를 찧었더랬다. 그 다음부터 날이면 날마다 비가 쏟아지더니 햇빛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날이 보름 넘게 이어졌다. 가을장마, 결국 사달이 나는 모양이다.
논배미에는 허옇게 말라비틀어진 벼이삭이 여기저기 고개를 떨구고 있다. 두 달 넘는 장마 끝에 초유의 흉작을 낳은 지난해 ‘백수현상’의 데자뷔. 그 때는 잇단 태풍으로 벼이삭이 말라 죽더니 이번엔 가을장마가 들이닥쳤다. 올해는 태풍 ‘오마이스’ 딱 하나 생겼고 그나마 순하게 지난 편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그 뒤로도 비가 그치지 않는 것이다.
다습한 환경이 되면 병충해가 생기게 마련이고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돼 있다. 아직 정확한 진단명을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목도열병’이지 싶다. 모가지를 균이 좀먹어 들어가면 이삭이 고스러질 수밖에 더 있겠는가.
사정이 이리 되고 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거다. 아무리 따져봐도 이 상황을 벗어날 길은 어차피 없었다. 병충을 예방하거나 구제하려면 농약을 쳐야 하는데 망하면 망했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설령 방제를 한다고 치더라도 비가 그치지 않으니 농약을 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형국이었다. 이래저래 이번 장마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농사는 결국 하늘에 달렸다”는 게 그저 옛말이 아님을 절감한다. 하여 순조롭기만 한 날씨에 취해 하늘을 노하게 한 일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 때 내리는 비를 핑계 삼아 ‘낮술판’을 벌인 게 화근이었는지도.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저 벼이삭처럼 일이 잘 되어갈수록 더욱 삼가고 진중했어야 했는지도.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태를 내리 출수기에 딱 맞춰 집중호우를 내려 보낼 수 있는가. 나아가 최근 3~4년을 내리 흉작으로 내몰 수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덜된 농사꾼의 한심한 짓거리에 노했다기보다 하늘이 아예 미쳐버린 건 아닐까.
그런 것 같다. 본시 가을비라는 게 이따금 찾아와서는 ‘우산 속에 이슬 맺히게 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보름이 넘도록 사정없이 내리치는 이것에 ‘가을비’라는 낭만스런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미친 날씨요, 재앙이라 불러 마땅하다.
“이래 가지고는 앞으로 농사 지어먹기 힘들지...”
늙은 농부가 내쉬는 한숨 속에 체념의 그림자가 너울댄다. 날씨가 미쳐버렸으니 어찌 농사를 종잡을 수 있겠는가. 이제 흉작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더러 갈수록 상황이 더 나빠질 거란 얘기다.
미친 날씨는 다름 아닌 ‘기후위기’의 다른 이름이다. 유엔 산하 범정부간협의체(IPCC)가 얼마 전 발표한 6차 기후변화평가보고서가 눈길을 끌고 있다. 요컨대 지구온난화 상황을 돌이킬 수 없는 기온 1.5도 상승 시점이 10년 더 당겨졌다는 것이다. 더불어 ‘인류멸종’이 머지않았다는 몇몇 비관적 시나리오도 제기됐다.
워낙 끔찍한 상황이라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의문을 품거나 ‘무슨 수가 있을 거야’ 막연한 희망에 기대는 듯하다. 아니 너무 끔찍한 일이라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어쩌면 ‘흉작’ 따위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흉작이 극단으로 치달아 뜨거워서가 아니라 굶어서 죽는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니 이제라도 뭐든 해야 하지 않겠나. 월간 <완두콩> 2021년 9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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