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4. 10:15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요즘 세상, 이래저래 어지럽고 뒤숭숭해서 우리네 마음도 보통 심란하지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벼농사두레 겨울 엠티(수련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변 정황으로 보자면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부터도 그랬습니다. 마음이 심란해 주저되기부터 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단 떠나보자. 서천, 그림 같은, 탁 트인, 겨울바다...
초점을 풀어버리고 지그시 바라보노라면 응어리진 마음도 이내 풀어지겠지. 아니면 짐짓 훌훌 털어버리든가. 수평선 위에 환각처럼 뿌옇게 펼쳐지는 노을을 응시하며 가만히 스스로를 다독여도 보고. “힘든 한해, 고생 많았어. 새해는 마음 다잡고 잘 풀어보자고...”
그리하여 서른 명 남짓이 1박2일 바닷바람을 쐬고 돌아왔다. 겨울, 그것도 바쁜 연말에 길을 나서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처음엔 참가 신청이 드문드문하더니 막판에 서너 식구가 몰리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일정이 겹쳐 함께 하지 못하는 이들이 앞다퉈 ‘찬조금’을 내고, 떡이며 술 상자로 아쉬움을 대신하는 흐뭇한 정경이 펼쳐졌다. 떠나기 전부터 이미 잔치 분위기.
영유아부터 초중생, 청년과 중장년에 이르기까지 세대로 따지자면 그야말로 ‘3대’가 섞여 북적이는 꼴이었다. 날씨는 흐릿하고 으스스했지만 사람들은 모처럼 신명이 났다. 한 무리는 탁트인 겨울바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거닐고, 또 다른 무리는 근처 홍원항 포구로 나가 해물전을 구경하다가 펄떡이는 횟감을 골라 잡는다.
싱싱한 활어회와 갑오징어 숙회, 가리비와 조개구이. 여기에 누군가 대파와 해물로 부쳐낸 신개념의 파전까지 더해 걸진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아이들은 이미 배달시킨 치킨으로 배를 불린 뒤다. 전통 술도가를 운영하는 회원이 공수해온 청주와 막걸리가 인기를 끌었다.
몇 순배가 돌고 밥상을 물릴 즈음 이번 엠티 핵심 프로그램인 ‘해변토론’이 시작됐다. 벼농사두레의 내년도 활동방향에 대해 허물없이 얘기를 나누는 자리다. 멀리 바닷가까지 와서 할 얘기가 많겠냐 싶었는데 뜻밖에도 진지한 토론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연회비 현실화’나 ‘집행체계 정비’ 같은 내부현안부터 벼두레가 차지하는 지역내 위상과 비중에 걸맞게 활동반경을 넓히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그렇다고 어렵게 바닷가로 왔는데 이 밤을 토론으로 지샐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여기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토론회 종료가 선언되자마자 홀 안에 설치된 출력 높은 노래방 기계에서 반주가 울려 퍼진다. 가무의 시간이 ‘광란의 밤’으로 돌변하는 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다.
밤늦도록 술잔 기울이며 얘기꽃을 피우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체력들도 좋아. 일찍 눈을 뜬 이들이 바닷물이 빠진 갯벌로 몰려가 조개를 캐느라 여념이 없다. 바짓가랑이에 흙탕물이 튀고, 엉덩방아를 찧어도 즐겁기만 하다. 벼두레의 네 번째 겨울바다 여정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 돌아보면 나로서는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무척 힘든 한 해를 보낸 듯하다. 만 하루의 나들이로 그 삶의 무게가 봄눈처럼 녹아내릴 리 없다. 그래도 탁 트인 바다를 가슴에 담고 갯내음 나는 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가다듬지 않았나. 도반들이 내지르는 환성, 터지는 박장대소에 물들어 새로운 기운을 찾지 않았나. 그것으로 되었다. 월간 <완두콩> 2022년 12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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