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8. 10:24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오늘은 집에서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동네 초등학교에 다녀왔다. 거기 6학년 아이들과 얼마 전 펴낸 졸저 <슬기로운 시골생활>(사우)을 두고 얘기를 나눴다.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특별수업.
그동안 이 책을 끈으로 비슷한 자리에 몇 차례 불려 다녔는데, 나로서는 오늘 수업이 여러모로 흥미를 끌었다. 귀농할 무렵 초등학생이던 둘째 아이가 이 학교를 2년 다니고 졸업한 인연이 있다. 그 바람에 나는 나대로 얼떨결에 팔자에 없는 학부모회장 노릇을 하기도 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아이가 졸업하고 나서도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이 학교는 해마다 6월 초에 ‘단오맞이 한마당’이라는 잔치를 열어왔는데(지금은 고산지역 잔치로 판이 커졌다) 거기서 내가 맡은 구실이 간단치 않은 까닭이다. 잔치의 핵심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참여하는 ‘손모내기 체험행사’인데 그 행사를 우리 벼농사두레가 주관하는 것이다. 모판과 못줄 따위를 준비하고 모내기 작업 진행을 맡는다. 그 인연 또한 간단치가 않을 터.
아이들은 이미 책을 다 읽은 상태였고 “이 책 지은이가 우리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실제로 교실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와~ 어디서 많이 본 분 맞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는 거라. 나는 나대로 시치미 뚝 떼고 인사를 건넨다. “우리 오랜만이죠? 그 새 잘들 지냈어요?”
이런 인연을 앞세우자 분위기는 금세 부드러워졌다. 수업 내용이야 책 내용을 요령껏 간추려서 전하는 것이다. 다만 아이들과 관련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책의 성격 때문에 싣지 않은 영상자료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리 준비한 질문지를 바탕으로 많은 궁금증을 쏟아내는 아이들. 그 진진한 모습이 앙증맞기 이를 데 없다. 특별수업의 마지막은 ‘저자 친필 사인’.
시골로 내려오면 자연에 묻혀 고요하게 살 줄 알았더니 뜻밖에 여기저기 불려 다닐 일이 꽤 되는 편이다. 물론 그동안 이래저래 ‘업’을 쌓아온 탓이 크다. 사실 내 얘기가 도움이 되는지도, 그럴 깜냥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뭔가 궁금하니까 부르겠지 싶어 여건이 맞으면 부름에 응하는 편이다.
달포 전에는 출판사 부설 연구소에서 불러 서울을 다녀오기도 했다. 연구소 회원 월례포럼에 ‘기후위기 속 시골살이’를 주제로 발표를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쟁쟁한 학자와 연구자들이 회원인데, 이거야말로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지 싶어 손사래를 쳤지만 “그냥 지금 살고 있는 얘기를 하면 된다”고 등을 떠미는 바람에 모처럼의 서울 길에 올랐던 것.
더러 뜬금없는 일도 벌어진다. 얼마 전에는 ‘완주 치유의 인생영화제’에 ‘선정위원’으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완주군이 설립하고 지역 예술단체가 위탁 운영하는 완주미디어센터가 마련한 행사인데 올해는 ‘지역인사가 추천하는 영화’를 기조로 잡았다고 했다. 졸지에 ‘지역유지’로 신분 상승이 된 것 같아 어안이 벙벙한데 농사단체 몫이라고,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해서 마지못해 수락했다.
‘내 인생의 영화’를 한 편 추천하고, 상영에 앞서 ‘추천의 변’까지 발표하라는 거 아닌가. 이미 엎질러진 물,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고. 머리 싸매고 고민한 끝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하나를 골랐다. 좀 생뚱맞나 싶기도 하지만 ‘내 인상의 영화’라며? 영화만 좋으면 그만이지.
어쨌거나 ‘무대 체질’도 아닌 내가 이런 모양새로 어쭙잖은 삶을 드러내고, 모르는 이들에게 말을 거는 게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지 나도 모르겠다. 이 고정칼럼(‘낭만파 농부의 시골살이’) 또한 같은 맥락이긴 하다만. 내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호응을 이끌어내지는 못 하더라도 건네는 얘기 가운데 하나라도 쓸모가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지 싶기도 하다.
그렇다 치고, 역시 앞에 나서는 것보다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누리는 편이 훨씬 편한 게 인생살이인가 보다. 엊그제 완주미디어센터가 마련한 네 번째 ‘농한기 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나야 ‘순수관객’으로, 하루에 한 번, 내리 닷새를 개근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올해는 실험성이 강한 독립영화들로 상영작을 고르는 바람에 가슴이 먹먹하기보다는 머리가 무거운 편이었다. 그러나 좋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농한기 영화제’나 들먹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 벼농사두레 ‘농한기 강좌’ 준비하자면 내 코가 석 자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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