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3. 14:37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이런 봄이 또 있었던가?
개나리, 벚꽃, 명자, 복사꽃, 배꽃... 자연의 섭리를 따라 차례로 망울을 터뜨려야 할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났다. 울안은 울긋불긋한 꽃 물결로 가득하여 그야말로 꽃 대궐을 차렸다. 느닷없이 펼쳐진 이 황홀경에 눈이 부시지만, 한편으로는 뒤죽박죽 흐트러진 개화의 질서가 기후변화에서 비롯됐다는 사실 앞에 가슴이 철렁한다.
아무튼 봄꽃 잔치는 보름도 지나지 않아 막을 내렸다. 이삼일 내리 쏟아진 빗줄기를 따라 꽃잎을 떨구었다. 바닥을 덮은 꽃잎은 바람 따라 흩날리고, 꽃잎 떠난 가지에는 연둣빛 새순이 돋았다. 봄날이 이렇듯 허망하게 흘러가도 되는 건가.
어쨌거나 꽃 지고 새순 돋으면 어쩔 수 없이 벼농사가 코앞이다. 안 그래도 지난 주말, 벼농사두레가 ‘경작설명회’를 열었다. 벼농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해마다 진행하는 행사다. 벼농사에 처음 뜻을 두고 지어보겠다는 이들에게 기본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전체 농사공정을 소개하는 자리다. 농사라는 게 한 두 해 경험으로 능숙해지는 게 아니니 기왕의 경작자들도 함께 하기 마련이다.
올해도 예닐곱 명이 경작을 쉬어가기로 했고 대략 그만큼의 새내기가 경작대열에 합류했다. 농사가 시작될 때 쯤에는 다 해서 스물을 조금 넘을 것 같다. 그 가운데 벼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생계형’ 경작자는 나 혼자다. 나머지는 내 나름대로 ‘레저형’이라 일컫는 부류. 직장인이든 자영업자든 생업이 따로 있지만 시골에 살면서 농사를 체험하는 한편 내 먹을 쌀을 손수 지어보겠다는 이들이다.
올해는 새로운 부류가 하나 늘었는데 술을 빚는 이들이다. 기업형 양조가 아닌 전통방식으로 좋은 술을 빚는 데 뜻을 두고 있다. 그러자면 좋은 원료를 확보해야 하는데, 수입쌀이나 질 낮은 가공용 쌀 대신에 ‘좋은 쌀’을 구해야 한다. 이들은 고심 끝에 유기농 벼농사를 통해 손수 깨끗하고 건강한 쌀을 지어내기로 뜻을 모았다.
이렇듯 이 땅 논배미에는 ‘가상한 뜻’이 펼쳐지고 있건만 벼농사를 둘러싼 환경은 심란하기 그지없다. 식단이 서구화되면서 해가 갈수록 쌀소비량이 줄고 있다. 쌀 전업농인 나로서도 그에 따른 타격을 피할 수 없다. 도농직거래로 지은 쌀을 처분하는데 해가 갈수록 주문이 줄고 있다. 생각다 못해 한 달 전부터 소비자들에게 쌀을 보내면서 ‘맛있게 드시고 주변에 홍보 부탁드린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런다고 문제가 풀릴까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게다.
안 그래도 “쌀이 남아돈다”고 야단이다. 그래서 쌀생산량을 줄여야 한다고, 다수확 품종을 퇴출시키고 논에는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는 방안을 ‘정책대안’이랍시고 내놓고 있다. 고산농협 앞에는 “벼 재배면적 10% 감축하여 쌀값하락 막아내자!”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사실 쌀이 남아돈다는 것은 허상이다. 우리나라 쌀 자급률은 정부 발표로도 84.6%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쌀이 ‘처치 곤란’인 까닭은 각종 국제무역협정에 따라 해마다 의무수입물량으로 들여오는 40만 톤의 외국쌀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쌀의 판로가 막히고, 쌀값이 폭락하고, 끝내 식량주권 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내몰린 것 아니던가. 도지는 기후변화 속에 기상이변이라도 일어나 심각한 식량위기가 닥치면 그때는 또 어쩔 셈인지.
이런 판국에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생태농사의 기운이 고산 땅에 넘실댄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심란한 것이다. 월간 <완두콩> 2023년 4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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