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어수선한 봄

2023. 3. 7. 12:28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어쩔 수 없는 봄이다. 얼음이 스르르 녹는다는 우수가 보름 전이었다. 그 즈음에 불명산 화암사 들머리에 복수초(얼음새꽃)가 하나 둘 샛노란 꽃송이를 피워올렸댔다. 그러더니 엊그제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에는 뜰앞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떠뜨렸다. 그러니 이제 누가 뭐래도 봄인 게지.

 

봄은 이렇듯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법이다. 하여 농한기도 그럭저럭 막바지로 치닫는 셈이다. 한 때는 눈 앞에 펼쳐진 이 무한의 자유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쏘다녔더랬다. 어느 해부턴가는 그것도 심드렁해지고 동안거에 든 수도승처럼 두문불출 스스로를 울안에 가둬두고 있다. 그렇게 세상을 관조하고, 삶의 근원을 찾아 궁구하는 시절.

 

그러다 불현듯 마주한 봄은 그야말로 생명의 약동, 목숨붙이들이 벌이는 향연이다. 사람들도 덩달아 심장이 고동치고 기운이 뻗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봄은 좀 수상한 것이 약동보다는 어수선함으로 다가온다. 옆집에서 풀어놓은 닭들이 울안을 헤집으며 모이를 쪼는 풍경이 어쩐지 느긋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며칠 전에는 뉴스에서나 봤던 산불이 눈앞에 펼쳐지는 바람에 그야말로 혼비백산.

 

건조한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어떤 이유로 불이 붙었고, 때마침 불어온 세찬 바람에 산불로 확 번진 모양이다. 이웃의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불길이 옆 산 능선을 타고 집 쪽으로 번지는 아찔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행히 이 불은 초기 출동한 산불진화대원들의 휴대용 물 분사기에 금세 잡혔다. 그러나 가운데 쪽 불길은 강풍을 타고 뒷산으로 세차게 번져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소방 헬기 네 대가 연신 물 폭탄을 퍼부어대고, 진화대원 수십 명이 사투를 벌였다. 80대 어르신의 안타까운 인명사고를 뒤로 하고 산불은 두 어 시간 만에 모두 꺼졌다. 홀라당 타버린 산비탈과 검게 그을린 나무들, 훅 끼쳐오는 매캐한 탄내... 혼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랄까. 소방호스를 사리고, 잔불을 끄는 진화대원들을 보면서 그만하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뜻하지 않은 난리통은 또 금세 잊혀지고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원래 가던 길을 꾸역꾸역 가게 돼 있다. 그러고 보니 올해 벼농사도 슬슬 준비할 때가 되었다. 오늘은 국립종자원 전북지원에 전화를 걸어 어수선한 와중에 깜빡 잊고 있던 찰볍씨를 주문했다.

 

벼농사는 4월말에나 시작되니 아직 농한기는 끝나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벼농사두레 농한기강좌첫 번째 강연이 진행됐다. 앞서 소개한 대로 코로나 국면을 거치고 난 뒤 오랜만에 재개되는 강좌인 만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벼농사 인문학을 주제로 잡았다. ‘논배미 바깥 이야기를 부제로 벼농사의 근원, 의미, 가치를 탐구하는 내용이었다. 벼를 둘러싼 과학적, 지리적 기초소양에서부터 자연(유기)재배의 철학, 전통시대 쌀과 벼의 역사, 근대의 벼농사에 이르기까지 흐름을 좇다 보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처음 듣는 얘기가 적지 않아선지 다들 귀를 쫑긋 세웠다.

 

이어지는 두 번째 강좌(326)토크 콘서트형식으로 마련된다. 벼두레 회원 4~5명이 패널로 출연해 대담을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벼농사 경력 10년이 넘는 이부터 올해 처음으로 도전하는 이까지 저마다 벼두레 활동에서 얻은 경험과 에피소드를 나누고, ‘벼두레식유기농 벼농사 공정에 대해 얘기꽃을 피우게 된다. 벼두레와 함께 몸소 벼농사를 지어볼 생각이 있는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라 하겠다. 월간 <완두콩> 2023년 3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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