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2. 05:36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장미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울안 잔디마당에 붉디붉은 자태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눈을 돌려보면 장미만이 아니다. 장미의 팔촌쯤 되는 하얀 찔레꽃부터 창포 붓꽃 데이지 금계국 수레국화 꽃양귀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초본과 이름들이 5월 꽃철을 수놓은 것이다. 이른 봄을 화사하게 물들였던 매화 복사 배꽃이 진 자리에 매달린 열매들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나무는 신록에서 짙은 녹음으로 하루가 다르게 우거진다. 그리하여 숲은 더욱 울창하고 깊어간다. 뻐꾸기 소쩍새 지빠귀 딱새 휘파람새 두견이… 거기 깃들어 사는 여름새들의 지저귐은 교향악처럼 울리다가 어느 순간 아련해 온다.
산자락엔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다. 들녘은 햇볕을 받아 후끈 달아올랐다가 어둠에 묻히고 나서 서늘해지기를 거듭한다. 그 가운데 보리가 익어가고 온갖 푸성귀가 자라난다. 상추며 쑥갓 온갖 채소에 쌈을 싸 볼이 미어터지도록 떠넣는 밥 한 숟가락이 어울리는 시절.
그럴 즈음 논배미에는 볏모가 쑥쑥 커가고 있다. 중부와 고원지역은 이미 모내기 철로 접어들었고, 아랫녘이라도 올벼(조생종)는 일찌감치 모를 내고 있다. 우리는 늦벼(중만생종)를 심는 터라 6월 초중순은 되어야 모내기철이다.
볏모는 지금 못자리에 머물러 있다. 모판을 못자리에 앉힌 지 스무날 남짓 흘렀다. 올해는 볍씨가 제대로 촉을 틔우고 두둑의 수평이 잘 잡힌 덕분에 다행히도 볏모가 고르게 커서 이제 한 뼘이나 되게 자랐다.
5월 중순까지도 냉해를 입을 수 있어 부직포를 덮어 보온을 하는데 보름 쯤 지나면 벗겨주는 게 보통이다. 모가 웃자라지 않도록 하면서 바깥 실온에 적응시키려 함이다. 그런데 갑자기 밤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그 시기를 일주일 남짓 늦췄더랬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예전 같으면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냥 밀어붙였을 터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지난해 모농사를 완전히 그르쳤던 충격과 그에 따른 깊은 트라우마가 농사일에 아주 신중하도록, 보수적으로 다가가도록 만든 것이다. 순간의 판단 착오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이어질 수 있고, 당장 편한 길을 찾다가 더 크게 헤매고 시간을 허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디 가더라도 검증된 확실한 길을 가야 한다는.
그런 우여곡절 끝에 오늘 저녁 부직포를 걷는다. 볕 뜨거운 한낮에 걷으면 여린 볏모가 ‘화상’을 입어 고스라지는 탓에 흐린 날이나 저녁 시간에 벗겨낸다. 둘이 한 조가 되어 부직포를 맞잡아 끌어당기면 하얀 포장에 덮여 있던 볏모가 조금씩 얼굴을 내민다. 하나 둘 셋… 차례로 두둑이 열리고 마침내 열 네 줄 짙푸른 융단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하얀 장막에 드리워졌던 자리에 느닷없이 눈부신 비밀의 정원이 솟아난 듯 들판의 풍경이 일변하는 둔갑술.
5월 중하순이 되면 해마다 마주하는 풍경인데도 그 때마다 나는 숨이 막힌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푸른빛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부직포를 열어젖힌 이들도 넋을 잃기는 매 한 가지. 이내 정신을 가다듬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아름다운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올해는 볍씨의 촉이 제대로 텄고, 모판을 앉힌 뒤 내리 이틀 때 맞춰 비가 내렸으며, 고랑의 물높이도 적당히 유지해왔다. 사나흘에 한 번 씩 부직포 자락을 들춰본 바로는 볏모의 생육상태가 무척 괜찮다.
“모가 그 어느 해보다 튼실하고 쪽 고르게 잘 컸네!”. 탄성을 내지를 수 있을까?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못자리로 향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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